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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부 1장, 거울의 신비 | 임병욱 목사 | 2024-1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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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호세아6:3절 개역개정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오늘부터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은유로 축약한 ‘디지털 기독교강요’를 새벽마다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첫 시간 1부 1장, 거울의 신비입니다.
이집트에서는 BC.3000년 경부터 이미 여성들이 거울을 보고 화장을 즐겼답니다. 거울의 역사가 놀랍지요. 중세에 와서는 거울이 훨씬 작아지고 휴대하기에 편리해졌습니다. 거울 역사에 혁명을 가져온 것은 유리 거울의 탄생입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유리 제작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에서 유리판 뒷면에 주석박(朱錫箔)을 붙이는 기술을 발명했습니다. 유리 거울이 무거운 청동제 거울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그래도 아직 거울은 너무 비싸 왕후나 귀족들의 독점물이었습니다. 그러다 17세기에 대형 판유리가 출현하면서 값이 대폭 싸졌고 덕분에 서민들도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 유리는 대량생산 되었고 도은법(鍍銀法)이 발명되어 거울은 일반 가정에까지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수많은 거울들이 온 세상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거울은 참으로 신비한 것입니다. 그 신비한 거울 중에는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 있고, 나 자신을 보는 거울도 있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병은 암입니다. 그러나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습니다. 에이즈입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일단 에이즈에 걸리면 몸에 침투하는 무슨 병이든 다 받아서 앓아야 합니다. 내 몸 속에 있던 경찰과 군인이 하나도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지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에이즈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어요. 무슨 병인지 아십니까? ‘무식(無識)’이란 병입니다. 처음 들어 봤습니까? 무식하군요. ‘무식’은 병중에 가장 비참하고 슬픈 병입니다. 무식이란 말은 지식이 없다는 말인데 무식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문자를 모르는 무식입니다. 옛말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했지요? 낫이나 기역자나 똑 같이 생겼는데 곁에 낫을 놓고서도 기역이란 글자를 도무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글을 모르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늦은 나이에도 공부하는 어른들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못 배우신 분들입니다. 그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삶이 아주 답답하고 깜깜하답니다. 글을 모르니 다른 사람들의 종처럼 살게 되더라는 겁니다. 그 분들 뿐입니까? 우리도 외국에 가면 역시 글을 모르는 무식자가 됩니다. 게다가 말도 못합니다. 우와! 그 답답함이란 이루 비길데가 없습니다. 완전히 장애인이 되는 겁니다.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글도 못보고---. 이것도 일종의 무식입니다. 중국에 갖다 놓으면 막 중국어로 말하고, 일본에 갖다 놓으면 막 일본어로 말하고, 프랑스에 갖다 놓으면 막 불어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신나는 일입니까? 무식과 유식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둘째, 예절을 모르는 무식입니다. 이것은 위 아래를 모르는 무식입니다. 예절은 곧 질서이지요. 초등학생이 선생님께 욕하고 빰 때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벌어집니까? 예절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예절이 꼭 필요합니다. 예절을 모르면 어디 가나 무식하단 소릴 듣습니다. 이런 예절은 사회 생활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예절에 무식하면 사람 사는 사회가 아니라 짐승이 우글거리는 정글이 됩니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무식이나, 예절을 모르는 무식도 엄청난 무식이지만, 세 번째 무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 번째 무식은 바로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식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을까?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죄를 지을까?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하는 것일까? 나는 왜 늙고 병들어 죽을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무덤 건너편에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누구일까? 자기를 모르는 무식이야 말로 정말 위험하고 무서운 무식입니다. 술이 잔뜩 취했는데 휴대폰 보면서, 거기다 졸면서 시속 200km로 달리는 운전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합니까? 그 자체가 비극이지요. 그런데,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서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 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오죽하면 대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란 말을 남겼을까요? 아마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몇 마디 말 중에 하나일 겁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을 아는 문제로 그렇게 평생을 고민하고 몸부림치던 소크라테스도 결국 자기 자신을 다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다면 여러분, 사람이 자기를 아는 지식이야 말로 얼마나 크고 깊은 지식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압니까? 손들어 보세요. 난 나 자신을 잘 안다..... 아마 맹장이 어디 달렸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 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위험한 무식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바로 자녀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몰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낳은 아버지 어머니를 몰라본다면 이 얼마나 무식한 것입니까?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맹랑하고 비참한 무식입니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하나님을 알려고 한 것입니다. 해가 하나님일까? 별이 하나님일까? 뱀이 하나님일까? 바위가 하나님일까? 그것은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제주도에서는 일년 중 딱 하루 그날에만 이사를 한답니다. 그러니까 난리가 나는 것이지요. 왜 그 날에만 전 제주도 사람들이 이사를 하냐면, 그 날이 바로 제주도에 있는 모든 귀신들이 한라산에 모이는 날이랍니다. 귀신들이 한라산에 모여 있는 그 틈에 잽싸게 이사를 하면 귀신이 방해 못 놓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사 할 때 집집마다 항아리에 구렁이를 담아 간답니다. 자기 집을 지키는 구렁이지요. 어때요? 터무니 없지요? 왜 이런 무식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이렇게 용감하게 무식해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서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 너무 뒤틀려 있고, 어두워져 있고, 더럽혀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이야 말로 우리 사람들에게 결정적입니다. 그 점에 무식하면 이 세상에서 살 때에도 물론 엉터리로 살지만, 내세, 천국에 못 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히 타는 불구덩이에 빠져 이를 갈며 신음하며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거기서는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없고 죽을 수 있는 자유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영벌을 받아야 합니다. 무식의 대가 치고는 가장 지독한 것이지요. 지옥은 이렇게 무식한 자들이 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무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글을 모르는 무식에서 해방되려면 열심히 글을 배우면 됩니다. ㄱ ㄴ ㄷ ㄹ , 가 갸 거 겨, 철수야 영희야 --- 하면서 배우면 세상에 가득한 이 모든 글들이 환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지요. 정말 글에 눈이 뜨면 신나는 세상입니다. 외국어도 그렇게 열심히 배우면 되지요. 미국 가서, 파리에 가서, 모스코바에 가서 오케이 땡큐 --- 막 통하면 정말 신나는 일이지요. 짐승같은 삶에서 벗어나려면 열심히 예절을 배우면 됩니다. 어른들, 부모님들, 교회와 학교 선생님들, 선배와 윗 사람들에게서 배우면 됩니다.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말할 땐 이렇게, 밥 먹을 땐 이렇게, 어른 앞에선 이렇게, 이성 앞에선 저렇게 --- 배우면 됩니다. 그러면 예절에 유식해집니다. 예절을 잘 갖추면 정말 폼 나는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 자기를 잘 알려면 하나님이란 거울을 보면 되고, 하나님에 대해 알려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됩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 간단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거울처럼 서로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란 거울을 들여다 보면 내 모습이 보입니다. 신비한 거울이지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래서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거울을 못 가져 본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거울만 비쳐 보면 쉽게 끝나는 일인데 거울이 없으니까 아무리 생각하고 아무리 말을 많이 했어도 자기를 보는데 실패해 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거울 없이 자기를 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란 그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을 들여 다 보면 또 하나님이 보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사람들이 그렇게 찾고자 했던 하나님을 나 자신 속에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펴 보면 너무나 신비하게 지어졌습니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발명도 하고, 착한 일도 하고---정말 사람은 신비합니다. 그러면 자기를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포함한 온 천하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날마다 붙들고 계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나 자신을 보면 너무나 약합니다. 몸은 흙처럼 부서집니다. 마음은 걸레처럼 더럽습니다. 내 의지는 항상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거리고 팔랑거립니다. 이런 나의 못난 모습을 보면 거룩하시고 존귀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이 더욱 뚜렷이 보입니다. 어둠 속에서 별이 더 밝게 빛나듯 어둡고 타락한 내 모습을 보면 위대하신 하나님이 더욱 영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에 대해 유식해지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공부해 나갈 것입니다. 그 거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통해 또한 우리는 역으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 거울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지식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 두 지식은 서로 단단히 묶여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또 어느 것이 그 다른 쪽을 생산해 내는지도 쉽게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샘의 근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성품과 은사들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 모든 성품과 은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시에 인간의 미련하고 교만한 마음과 더럽고 악한 성품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과 끝없는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해와 달, 별이나 나무나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것이지요.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알아야 하나님께 찬송이 터져 나오고,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있는지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풍성하신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지 못하니 자기만족에 빠져있게 되고, 그러니 자신을 미워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기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은사들을 깨달으면 더욱 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자신의 비참함과 더럽고 악함을 깨달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 하나님을 찾게 해줍니다. 둘째 거울은 하나님을 보아야 자신이 보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밝히 본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명백하고 온전한 기준을 모르면 결코 사람은 자신의 불의와 더러움과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충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교만이란 눈 가리개를 쓰고, 위선이란 가면을 쓰고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 사람은 항상 자신을 어느 정도 괜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가면 같은 거짓 의를 얼굴에 쓰고 자신도 그 가면에 속아 스스로를 만족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온통 부패해 있고 더럽혀져 있지만, 좌우에 있는 사람끼리 비교할 때는 남보다 조금 더 나은 거룩 때문에 흥분하고 즐거워합니다. 마치 그것은 맨날 검은 색만 보던 사람이 조금 희끄무레한 색을 보고는 너무 하얗다고 놀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항상 자신을 거의 신적인 존재로 착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언제나 땅만 바라보며 제 시력을 자랑하던 사람도 태양을 보면 곧 그 시력을 잃게 되는 것처럼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제 아무리 자랑하는 거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그것에 비하면 곧 그 자체가 죄요 사악한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선 인간은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성도들마다 너무 충격을 받아 거의 죽을 만큼 두려워하고 놀랐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랑하던 지혜와 의와 거룩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비천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란 말을 자주 했고, 욥은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선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님을 강력한 논증으로 선포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자신이 ‘티끌과 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당하지 못했고, 하늘의 그룹 천사들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우고서야 그 두려움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광채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류가 갖고 있는 지식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 자신을 비춰 주는 거울이고 우리 자신에 대한 거울은 하나님을 비춰 주는 거울입니다. 하나님을 자꾸 알아 가십시오. 그러면 나의 위대함도 비참함도 배우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나도 자꾸 들여다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경외감과 찬송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히 공부해서 나 자신에 대한 무식에서 해방되십시오. 그러면 적어도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보다 여러분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하나님에 대한 무식에서 해방되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유식해지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와 다릅니다. 학교 공부는 우리의 머리에 새겨지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집니다. 우리 마음에 변화를 줍니다. 우리 마음을 찌르고 우리의 마음을 새깁니다.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통쾌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에 꿈을 주고, 우리의 마음에 천국을 세우고, 우리의 마음에 컴퓨터 게임과 술과 돈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부어줍니다. 오늘부터 새벽마다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이렇게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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