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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9장 : 예고편과 영화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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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베드로전서1:10-12절 개역개정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19일 금요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9장입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지요.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마치 예고편과 본 영화의 관계와 같습니다. 이 내용을 예고편과 영화라는 제목을 공부해 봅니다.

영화를 파는 사람들은 그 영화의 예고편을 만드는 일에 정성을 들입니다. 예고편은 우선 재미 있어야 합니다. 그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흥미를 일으킬 수 있어야 하니까요. 또 예고편은 분명해야 합니다.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성격을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애정영화인지, 공포영화인지, 액션영화인지, 공상과학 영화인지---. 그리고 예고편은 정확해야 합니다. 예고편이 아무리 재미 있고 아무리 멋있어도 본 영화의 내용을 틀리게 전달하고 있다면 정말 난처한 일 입니다. 예고편은 뭐니 뭐니 해도 본 영화의 주제를 정확히 예고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고편을 보면서 본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를 기다립니다. 드디어 상영되는 날 영화를 보면서 아 예고편의 그 장면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라고 무릎을 치는 것입니다. 율법(구약)예수 영화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그리고 복음(신약)은 바로 그 예수 영화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이미 율법에서 예고 되었고 복음에서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속죄 의식과 제사 등은 하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그 예고편에도 지금 신약 시대의 우리가 분명하고 완전하게 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희미 하지만 어느 정도는 뚜렷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와 사도 베드로의 말을 비교해보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말라기는 자기가 죽은 후에 예언자의 직책이 중단되겠으므로 모세의 율법을 계속 더 열심히 지키라고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다음, 의로운 해가 떠오르리라.’고 선언했습니다(4:2).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 유대의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기대하며 살도록 도움을 주기는 하겠지만 장차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오실 때에 비로소 세상은 훨씬 더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후에 사도 베드로는 말라기의 그 말을 이렇게 마무리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2)10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 니라 12이 섬긴 바가 자기(혹은 구약 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신약 시대의)를 위한 것임이 (복음을 통하여)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어떻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나 백성들은 보물을 대해 말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웠으나 그렇게 해서 그들은 그 보물을 신약의 백성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우리들은 옛 언약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사는 것입니다. 마치 예고편을 보는 사람보다 본 영화를 보는 사람이 훨씬 더 즐겁고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그 위대한 사실을 깨닫기를 바라셨고(10:23-24; 13:16-17; 5:46; 8:56), 사도 바울도 옛 시대의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빛을 우리 마음에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후4:6). 히브리서 기자는 그 점을 분명히 비교해 말씀하고 있습니다(1:1-3).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대낮처럼 밝히 드러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고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옛 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가증하고 비열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냅니다. 드디어 본 영화가 상영된 것이지요. 물론 복음이란 말을 넓은 의미로 보면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에 대한 증언들도 다 복음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높은 의미로 볼 때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은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의미로 복음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4:17,23; 9:35; 1:1; 딤후1:10).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멘으로 발견되는 것입니다(고후1:20,22). 그리고 율법에 간략하게, 잠시 예고 되었던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충만히 드러나는 것입니다(고후3:13-18).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써 옛날 야곱에게 나타났던 사닥다리의 실재가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고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에게 하늘 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28:12; 1:51).

그러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세베르투스의 악마적인 공상처럼 율법이 약속하던 모든 것이 다 끝장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영화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의 모든 구원에 대해서 이루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들을 이미 다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약속이 희망의 보호 아래 남아 있습니다(3:3-4; 8:24-25). 그래서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모두 약속이 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딤전4:8)? 다음 말씀도 우리에겐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진 믿음이나 구약의 성도들이 가졌던 믿음은 똑같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지요.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2) 또한 우리가 받은 약속이나 구약 성도들이 받았던 약속도 똑같은 것입니다(고후6:16-7:1). 다만 그 질이나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즉 율법은 그 약속을 모형적으로 그림자처럼 보여 주었으나 복음은 확실하게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은 서로 반대되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율법은 행위의 공로를 주장하고 복음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강조한다고 말하면서 그 둘을 대립 시킵니다. 물론 그런 대립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바울이 그런식으로 사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종종 율법이란 말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벽한 의의 표준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그 표준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그것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며, 거기서 눈꼽 만큼이라도 빗 나가는 사람에게 저주를 더 하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할 때는 주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할 때입니다. 사람은 너무 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율법의 약속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용서 받고 의로운 자로 인정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3;21 이하; 3:10).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을 대립 시킨 바울의 강조는 정당하고 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할만큼 율법 전체를 폐지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율법이 약속했던 모든 것을 확인하며 실현했으며, 그 그림자들에 실체를 준 것이지요.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까지라.”(16:16; 11;13)라는 말씀은 율법 시대의 백성들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보다 훨씬 낮은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을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만(1:16), 그것은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3:21; 16:25,26). 예고편이나 본 영화가 사실은 같은 것을 말하지만 그 보여지는 정도가 훨씬 다른 것처럼,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계시의 명료도의 차이일 뿐입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난 그 은총이 너무 풍성하고 크기 때문에 예수님의 강림을 통해 천국이 이 땅에 건설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1:23).

그런 면에서 세례 요한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서서 양쪽을 다 관계한 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의 사촌 형제이기도 한 세례 요한은 독특한 사람이지요. 그는 율법과 복음 사이에 서 있던 선지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마지막 선지자이면서 또한 동시에 복음의 문을 여는 첫 선지자이기도 했지요. 그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소개 할 때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나타냈습니다(1:29). 그러나 그는 부활로 드러난 저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사도들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 이 말씀의 뜻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모든 선지자들 보다 앞 세우신 다음에 복음 전파(천국)를 최고의 지위에 올리시는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의 선구자였고(4:5), 그리스도를 위해 제자들을 준비하는 켜서 비취는 등불’(5:35)이었고,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1:23; 40:3)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세례 요한을 복음 전파자 중 하나로 여겨야 합니다(1:33;). 그러나 요한이 시작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사도들에 의해 훨씬 자유롭게 완성되어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듯 율법은 복음의 예고편이고, 복음은 율법의 본 영화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을 기대하게 만들고 신약은 구약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율법 시대에 살던 성도들은 호롱불을 들고 밤길을 가던 자들이라면 이제 복음 안에 사는 우리들은 의로운 해가 둥실 떠 오른 대낮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동안 종 노릇하던 이스라엘에서 구출하기 위해 죽인 당한 수많은 어린 양들을 본 기억이 납니까? 그 어린 양들이 누구입니까? 또 성전에서 매일 죽여 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어린 양들이 기억 나시지요? 이 어린 양들은 또 누구입니까? 구약의 어린양은 바로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우린 신약 성경을 통해 구약 예고편이 살짝 맛만 보여 주던 구원에 관한 모든 진실을 다 알았습니다. 구약에 어린 양으로, 혹은 성전으로, 혹은 제사장으로 등장했던 주인공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란 것을 우린 다 압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영화의 속편이 있다는 것입니다. 완결편이지요.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세상의 모든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 삼켰던 자들을 토해 낼 겁니다. 바다가 그 삼켰던 자들을, 하늘이 그 가두었던 자들을 토해내며 지구 역사상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있을 위대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땅이 변하고 저 하늘이 말리고 별들이 떨어지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될 것입니다. 드디어 천국이 완성될 겁니다. 물론 우린 아직 그 영화를 못 봤기 때문에 희미하게 알 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 그 영화를 다 보고 기뻐할 겁니다. ‘아하! 그 때 임병욱 목사가 설교하던 것이 바로 이 내용이구나. 이 장면이구나.’ 박수치며 깔깔대며 좋아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예수 영화의 완결편이지요. 할렐루야!

오늘 우린 영화를 구경했습니다. 여러분은 구약과 신약을 열심히 읽고 외우고 공부하세요. 그래서 예수 영화의 전문가들이 되십시오. 세상 사람들에게 그 영화를 설명하고 전하십시오. 평생 살면서 해야할 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예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이제 곧 완결된 속편 하나님의 나라 영화에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예수 영화의 예고편과 본편을 통해 완결편의 주인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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