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과정

  • 홈 >
  • 배움터 >
  • 기독교강요 과정

이곳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메타포로 배우는 곳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셔서 네이버 카페 / 소풍교회 배움터 / 로 가시면 기독교강요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을 눌러 보세요.

소풍교회 배움터 바로가기

기독교강요 과정
기독교강요 2부 8장 : 두 돌판 임병욱 목사 2024-11-0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4

http://www.sopung.or.kr/bbs/bbsView/166/6459656

[성경본문] 마태복음22:37-40절 개역개정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18일 목요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8장입니다. 십계명(도덕적 율법)에 대한 해설이지요. 두 돌판이라는 제목을 공부해 봅니다.

십계명은 원래 돌에 새겨진 글이지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두개의 돌판에 하나님이 직접 새겨 넣으셨습니다(31:18). 그 두 돌판은 수 세기동안 성전의 지성소 안 언약궤에 보관되어 오다가 바벨론 포로 시대(B.C.606-536)에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고스란히 성경에 옮겨졌지요(20:2-17). 그리고 오늘날 성령께서는 그 계명을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각각 새겨 주셨습니다(31:33; 10:16).

성경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은 모든 사람의 양심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선천법(先天法) 혹은 자연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앞서 배운 것처럼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오류와 암흑에 덮인 인간은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글로 된 법(성문법 成文法)을 우리에게 주셔서 선천법의 그 희미했던 것들을 밝히 보여주시려 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이라 하니까 그 의미가 좀 모호하지요? 법률이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더 쉽게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율법의 기초요, 근간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주어집니까?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두 돌판에 기록해 주시지요.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지 석 달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첫번째 인구 조사를 합니다. 여자와 어린아이 빼고 20세 이상의 남자만 603,550명이니까 못 잡아도 총 인구는 3백만이 되었을 겁니다. 적은 숫자가 아니지요. 이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이동하면서 광야 40년을 돌아 다니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일은 정말 장난이 아닌 사건이었습니다. 수 천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이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가 없는 대 사건입니다. 그렇게 많은 숫자가 한 공동체로 40년을 광야 사막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하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에게는 법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자 마자 적당한 곳으로 인도해 놓고는 거기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은 어디에다 주셨습니까? 돌을 깎아 만든 판에다가 새겨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두 돌판에 새겨 주신 것은 그것이 계약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세 당시의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땅을 나누어 주던 주군과 그 땅을 받아 관리하던 봉신들 간에 계약서를 작성해서 보관했는데 하나는 주군이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봉신이 보관했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은 계약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약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율법의 근간인 십계명을 두 돌판에 기록해 주신 것은 하나님과 백성들 간에 계약서임을 분명히 밝히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고대 근동의 주군과 봉신의 계약서 형식처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계된 종교적 의무들입니다(1-4).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상대로 한 사랑의 의무들입니다(5-10). 예수님은 율법 전체를 그 두 제목으로 요약하셨습니다(10:27; 22:37,39). 어떤 사람들(로마 카톨릭)은 어리석게도 셋째 계명을 없애고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눕니다. 또 첫째 판의 계명과 마지막 계명을 어기는 것은 소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죄에 무슨 소죄와 대죄가 있습니까?(5:19) 어쨌든 첫째 계단 없이 둘째 계단이 없듯이 하나님께 대한 의가 없이 사람에 대한 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여 더럽히면서 음행으로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천주교는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눕니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다 갖춰지면 대죄라고 합니다. 하나는 죄목이 커야 합니다. 다음은 내가 그것을 알고 행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가 내 자유로 그 죄를 지어야 합니다. 할 수 없이 짓는 죄는 대죄가 아닙니다. 내가 원해서 짓는 죄이어야 합니다. 이상 세 가지가 동시에 갖춰질 경우 짓는 죄는 대죄가 됩니다. 반대로 죄목이 작거나 모르고 지었거나 할 수 없이 죄를 지은 경우에는 소죄가 됩니다. 대죄는 반드시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해야 하고, 소죄들은 금식이나 기도, 자선행위 등을 통해서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혀 성경에도 없는 소설을 쓴 것이지요. 칼빈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들과 마지막 계명은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지을 수도 있는 죄들이라 해서 소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계명을 뺐습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이지요. 대신 마지막 10계명을 둘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또 하나는 네 이웃의 집(재물)을 탐내지 말라. 그렇게 9계명 10계명을 만들어서 십계명을 자기들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통치자이시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백성이구나. 하나님이 내 삶의 주권자이시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백성의 삶이구나.’를 잊지 않고 그대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십계명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경건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전체의 목적은 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순결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해야 합니다. 바로 그 사랑의 샘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흘러 나오니까요(6:5; 22:37,39). 디모데전서 1:5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진정한 경건(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을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사람을 보며 점수를 매겨 사랑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악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사랑하기 보다는 미워하기가 더 쉬우니까요. 그래서 항상 먼저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제 예수를 믿으니까 율법은 필요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것은 율법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통치자이시고그들은 죄인임을 잊지 말라 하신 것이라고 그랬지요그리고 그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 어린 양을 잡아 피흘려 죄사하는 것이었습니다때가 차매 하나님은 어린 양을 잡아 제사하던 방식으로 죄를 용서해 주시던 것에서 이제 어린 양의 실체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그리고 이젠 율법을 돌판 대신 성령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옛날 돌판에 새겼던 것을 모든 시대모든 세대의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해 돌판 대신 성령을 통해 마음판에 새겨 주신 것입니다핵심은 여전히 하나님이 통치자이시고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십계명의 핵심 그대로 입니다그러니까 하나님은 돌판 대신 죄인의 마음판에 하나님의 법을 새기고율법의 정죄의 기능 대신 은혜의 기능을 더 강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정죄를 이기고성령을 통해 마음 판에 율법을 새긴 것입다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 십계명(율법)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 봅니다.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계명들 대부분이 제유법(부분적 표현법)으로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표현은 살인이란 언어가 담을 수 있는 비슷한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시기,미움,질투,폭행,폭언,살인 등이지요. 살인은 그 비슷한 무리 중 가장 흉악하고 무서운 것이라서 선택된 것입니다. 둘째, 표현된 계명의 반대쪽으로도 추론을 해나가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반대 쪽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금지하신 것은 반대로 선한 의무를 명령하신 것이지요. 셋째, 표현된 계명의 안쪽으로 추론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신체를 상하거나 죽이는 것과 동시에 마음으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까지도 금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항상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목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리해볼까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왜 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몸과 마음을 다해 힘 닿는데 까지 이웃의 생명을 돕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계명을 해석하는 것이 바로 영적인 해석입니다(5장 산상수훈 참조; 7:14).

이제 십계명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배웁니다.

서언: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0:2). 율법 전체에 대한 머리말이지요. 세 가지를 말씀해주지요. 첫째, 하나님은 그렇게 명령할 권세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7:6; 31:33). 둘째, 은혜를 기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율법에 복종하며 배은망덕하지 말라고 경고해주십니다. 셋째,‘여호와란 이름을 통해 자신만이 참 하나님이심과 전 우주의 절대 통치자이심을 선포하십니다(11:36). 출애굽한 옛 이스라엘은 죄에서 해방된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곧 오늘날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첫째 계명.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20:3).”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시고 하나님만이 명령할 권세가 있다는 것이지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하나님만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둘째는 모든 미신을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둘째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20:4-5).” 미신적인 의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는 영적 경배이어야 합니다. 역시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무한하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어떤 형상 등으로 만들어 인간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인간의 감각 세계에 가두려 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어떤 형상이든 종교의 이름으로 경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하도 많은 우상을 만들어 섬기기 때문에 이 둘째 계명을 성경에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파내 버렸습니다. 종교의 대상으로, 우리의 예배와 기도를 받는 대상으로 어떤 형상이든 만들거나 그리거나 새기면 안 됩니다. 오직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 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 드리고 찬양을 드립니다.)

셋째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20:7).”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그리고 경외심을 갖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그 이름에는 합당한 찬양을 돌리고, 장난이나 미신 그리고 탐욕으로 그의 말씀이나 신비들을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겁없이 하나님과 그의 행적들을 비방하고 악평하는 짓은 금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한 것일 때에만 진실하게 해야 합니다(19:18;1:9). 재세례파는 모든 맹세를 배척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금하시는 맹세는 거짓되고 불필요한 맹세, 즉 율법의 표준을 어기는 너절한 맹세들입니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경건과 사랑을 위한 것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습니다(삼상24:12;고후1:23;3:13; 21:24; 31:53-54).

넷째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20:8-10).” 안식일 성수는 마치 경건의 상징처럼 크게 취급되어 왔습니다(15:32-36;20:12-13;56:2). 그런데 어떤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유대교적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제 칠일에서 첫째 날로 옮긴 것뿐이니 일주일 중 하루를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거룩한 날로 구별해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유대인보다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입니다(1:13-15,58:13). 이제 교회는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곱째 날이든 첫째 날이든 우린 더 이상 구약의 백성들처럼 일주일 중 어느 하루를 구별해서 의식적으로 지키거나 거기에 어떤 상징적인 영적 의미를 두지도 않습니다. 오직 교회가 첫날을 주의 날이라 부르며 모임의 날로 정한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열심히 모일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0:25). 둘째, 매일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질서 유지와 경건 훈련에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의 모임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2:42). 넷째, 안식일에 상징으로 주셨던 영적 의미(안식)가 예수 안에서 성취 되었으므로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선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음 몇 가지 목적을 위해 주일을 지킵니다(고전16:2;1:10). 첫째, 휴식입니다. 어떤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고 지키는 휴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고 묵상함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경건 훈련입니다. 부지런히 개인 경건을 훈련하며 교회가 제정한대로 공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며 공중기도에 힘쓰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자비입니다. 수하에 있는 사람들의 노동을 쉬게 하고 그들을 가혹하게 압박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다섯째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20:12).” 윗 사람들을 존경하여 경의를 표하고(21:17; 20:9; 20:20), 복종하며(21:18-21; 6:1-3), 감사로 대하라는 것입니다(15:4-6). 친근하고 쉽게 복종할 수 있는 부모를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윗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습관을 바르게 유도하고 훈련시키시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오직 주 안에서만해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6:1). 그들이 앉은 높은 자리는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요.

여섯째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20:13).”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의 영혼의 안전과 구원을 위하여 힘쓰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 계명은 두 가지 근거를 갖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가 다 한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20:14)” 마음의 순결과 몸의 정조를 깨끗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고전7:34). 함부로 독신을 선택하지 말고(19:11-12), 우리 대부분은 결혼제도 안에서 타오르는 정욕을 절제하며(고전7:2,9), 자기 짝과 함께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2:18).

여덟째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20;15).”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지 말며 적극적으로 남의 유익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남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 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에게 진 빚을 갚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홉째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20:16).” 거짓말로 남을 해하거나 재물을 해치지 말고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를 위해 진실한 말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물론 징계할 목적으로 하는 공정한 비난이나 징계를 금하는 것은 아니며 악을 시정하기 위한 정당한 비난이나 비평도 금하지 않습니다. 거짓 증거는 미움을 갖고, 악한 의도로, 훼방을 위해 하는 험담을 말합니다.

열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20:17).” 사랑하는 습성과 반대되는 모든 욕망을 마음 속에서 몰아 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웃에게 손실을 입힐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직 이웃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는 생각을 두라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우리 마음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공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마음에 사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탐심은 반대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본래부터 타락한 죄인인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 모습을 바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우리의 죄악됨을 바로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일깨워줍니다.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그 율법을 이제 우리 마음 속에 새겨주셨습니다(31:33;10:16). 새 언약이지요. 그러므로 새 언약을 받은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쉽게, 더 분명하게, 더 온전히 율법을 알고 지켜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회개하는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십니다. 주의 계명을 읽고 듣고 그대로 지켜 행하는 자가 참된 성공자요 복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1:3). 십계명은 천국 백성이 이 땅에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법입니다. 대한민국 백성은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린 모두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우리 힘으로 그것들을 다 지킬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지킬 수 있는 약속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그 계명들을 기쁨으로 잘 지켜 좋은 천국 시민들 되셔서 하나님께 또 큰 상을 받고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기독교강요 2부 9장 : 예고편과 영화 임병욱 목사 2024.11.07 0 43
다음글 기독교강요 2부 7장 : 몽학 선생 임병욱 목사 2024.11.07 0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