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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7장 : 몽학 선생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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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기독교강요 2부 7장입니다. 본 장에서 칼빈은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요. 고대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의 가정에는 특별한 노예가 있었습니다. 16세 이하의 주인 집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는 노예들입니다. 그들을 ‘파이다고고스’(유아 돌봄 가정교사)라고 불렀지요. 그들은 성인이 될때 까지 주인의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고 다니거나 바르게 행동하도록 가르치고 지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바로 그 ‘파이다고고스’(유아 돌봄 가정교사)라고 불렀지요(갈3:24). 개역한글에서는 ‘몽학 선생’으로, 개역개정은 ‘초등교사’로 번역했습니다. ‘몽학’(蒙學)은 어린 아이들이 배우는 학문을 말합니다. 요즘 말로 초등학문을 뜻하고, 그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선생을 ‘몽학 훈장’ 또는 ‘몽학 선생’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 초등교사의 옛 표현인 ‘몽학 선생’이라는 비유로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들과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한마디로 그것으로 백성을 억제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희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배양하시려는 것입니다. 곧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몽학 선생’입니다(갈3:24).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구약 백성의 마음을 준비하며, 그들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과 기대를 강화시켜주고, 그 기다림이 오래 지체되더라도 지치지 않게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이라는 말은 모세의 율법 전체, 곧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 제사법, 그리고 각종 민사,재판,의식법 등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제사법은 다 그 형식 하나 하나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종 그것을 모르고 다만 그 형식에 집착하곤 했지요. 목적이 빠진 형식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마치 악취나는 기름과 역겨운 짐승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는 얼토당토 않는 짓이었지요. 본래 하나님의 본성은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경배 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 예배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들이 담고 있는 ‘참 것’, 신령한 것으로 예배하는 것이지요. 율법의 예배 형식은 하나 하나가 모두 ‘참 것’을 담고 있는 그림자요 예표입니다. 그러면 그 ‘참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이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제4장부터 11장까지에서 구약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만 맡겨 두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히9:9-12).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때가 오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고 허무하다는 것을 아주 자세하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강조합니다(롬10:4). 구약의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덕적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요(신30:9-10). 그러나 사실은 우리 입을 막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율법 앞에 서서 아무도 변명할 수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으니까요. 죄인들은 율법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죽음과 가까이 있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누구도 이 율법의 협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갈3:10)“10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도라 할찌라도 ‘사망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12:30) 하나님을 사랑할 만큼 완전한 사랑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육정’이라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부패한 육체를 벗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아무도 율법의 완전성에 가까이 갈 수 조차 없습니다(전7:20; 시143:2; 욥9:2;갈5:17; 3:10; 신27:26).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런 질문이 저절로 나오지요?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마19:25-26)“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지만, 율법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은 힘써 우리를 그 약속으로 인도하는 성실한 몽학 선생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할까요? 율법, 특히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하는 일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기능, 자만의 가면을 벗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의를 밝히 보여주고, 우리 각 사람의 불의를 낱낱이 드러내어 무수한 죄악이 자기 안에 버글거림을 깨닫게 해주지요. (롬3:20)“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심지어 율법은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게 합니다. (롬4:17)“15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고 해 놓고, 그것을 지킬 수도 없고, 도리어 진노를 이룬다니요? 그렇다면 율법은 우리를 모두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덕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을 다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지키지 못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도덕법을 다 지킬 수가 없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왜요? 죄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가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갑니까? 나라의 법 전체를 어겨야 죄인이 됩니까? 아니면 그 중에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됩니까? 예컨데 길 가다가 갑자기 지나가는 사람을 찔러 죽인 사람이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 살인자가 큰 소리 칩니다. ‘왜 그래, 뭘 겨우 살인 하나 한 것 갖고? 우리나라에 법이 얼마나 많은데. 난 나머지는 다 지키는 사람이야. 교통 신호도 지키고 세금도 잘 내고 도둑질도 한 적이 없어. 그런데 겨우 살인 한번 한 것 가지고 왜 이러는 거야? 엉?’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분명히 범죄자이지요. 구약 백성들은 아무리 애를 써서 하나님의 율법들을 지키려고 했어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되는 겁니까? 모두 죄인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법을 어겼으니까 하나님께 죄인입니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에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게 제사법입니다. ‘성전에서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너희 대신 그 피로 제사로 드려라. 내가 너희 대신 죽는 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너희의 죄를 없는 것으로 쳐 주겠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죽을 죄인임을 깨닫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용서해 주시고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린 양 잡아서 피로 제사를 안 드리겠어요? 얼른 드리겠지요? 그렇게 어린 양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처음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할 때 뭐라고 말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랬습니다. 구약 백성들은 율법의 멍에를 매고 끙끙 거리면서도 계속 어린 양의 피로 제사를 드리면서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율법이 하는 일은 이렇게 구약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고 자기들이 구원 받을 길은 오직 예수님의 은혜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하는 일은 그 정도였지요.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은총의 영이 없으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며 죽이기 위해서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할 수만 있다면 율법을 알기만 해도 구원 얻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한 본성은 영적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과 항상 격렬하게 싸우며 징계를 받아도 결코 시정되지 않기 때문에 듣고 순종하면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된 율법이지만 오히려 죄와 죽음의 원인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기능, 굴레를 씌워줍니다. 같은 율법이라도 불신자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전혀 다른 효과를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율법의 약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게 되지만, 불신자들은 완강한 마음으로 율법을 거부하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끼게 됩니다. 곧 율법은 악인들에게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라는 굴레를 씌워 악을 억제함으로써 사회를 보호합니다. 악인들은 율법의 위협과 강압을 느끼지 않으면 악을 자제하거나 공정한 일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물론 악을 억제한다고 마음에 무슨 감동 감화를 받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방해하기 때문에 더러운 생각을 가슴 속에만 간직하고 날뛰는 정욕을 감히 마음대로 발산하지 못할 뿐입니다(딤전1:9-10). 그러나 자기를 억제할수록 더욱 정욕은 끓어 올라 율법의 두려움과 부끄러움만 방해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폭발할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율법은 물론 하나님까지도 없애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이런 억제되고 강요된 의라도 인간 사회를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이 아직 여전히 불신앙 가운데 있을 때에도 율법은 몽학 선생이 되어 그들 속에서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가면을 벗게 만들지요.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그 무엇을 구할 준비를 하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굴레를 쓰게 합니다. 육의 정욕대로 날뛰게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율법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억제시킵니다(벧전2:12). 물론 그 굴레들은 주의 자녀들이 갖는 참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니지만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저들을 보존하는 데 아주 유용한 것입니다. 셋째 기능, 교훈과 충고입니다. 율법은 신자들을 교훈하고 충고하여 선을 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습니다(렘31:33; 히10:16). 그래서 성도들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열심을 갖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런 성도들에게 두 방면으로 혜택을 줍니다. 하나는 배우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이해하는 데 훌륭한 도구입니다. 율법을 공부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새로운 전진이 없을 만큼 지혜가 충분한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충고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는 율법을 자주 묵상함으로써 복종하겠다는 열성을 얻으며 복종할 수 있는 힘을 얻으며 죄 짓는 길에 들어서지 않게 됩니다. 모든 성도는 항상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시1:2; 19:7-8; 119:101-105; 딤후3:15-17).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모든 율법은 폐하여졌습니까?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셨다고 모세를 집어 던지고 두 돌비를 깨뜨립니다. 그러나 율법은 악인에게는 정죄의 근거로 주신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은혜로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하고 또 완전한 목표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6-17). 다만 신자들에게 율법이 폐지 되었다는 것은 공포심을 주고 정죄하고 파멸에 몰아 넣는 율법의 효력이 신자들에게는 폐기되었다는 것입니다. 계명 자체가 폐기 된 것이 아니라 계명의 정죄하고 속박하는 힘이 소멸되었다는 뜻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신자들이 갖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기 때문입니다(갈3:13; 4:4-5; 벧후1:1). 그러나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율법의 저주가 역사합니다(갈3:10; 신27:26). 하지만 구약의 의식법들은 문제가 조금 다릅니다. 의식들은 효과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의식들의 효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완성되었고 살아 역사합니다(골2:17; 마27:51/히10:1; 9:1-15). 구약의 의식들은 죄를 증거할 뿐 죄를 없이 할 힘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법조문에 쓴 증서’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리셨습니다(골2:13-14). 그렇게 율법은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를 훈련시키고 지도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은 은혜가 아니면 지킬 수 없고, 은혜 안에서라면 지킬 수 있는 완전한 표준입니다. 그 율법은 교만의 가면을 벗겨주고, 악인들에게 굴레를 씌워 주기도 하며, 성도들을 교훈과 충고로 가르쳐 선을 행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율법은 이제 그 효과가 완성되었고, 저주는 폐지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 없으면 사람은 누구나 율법의 요구 앞에 얻어맞고 케이오 되야 합니다. 율법의 펀치에 평생을 두들겨 맞다가 나중에 죽어 지옥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그 모든 펀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맞아 주신 겁니다. 우린 예수님 뒤에만 있으면 한대도 안 맞아도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율법이 ‘너는 죄인이다. 심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저주가 네게 있다. 너는 지옥에 가야 한다.’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십자가의 권능이 그 모든 화살을 다 막아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율법의 계명들을 순종하고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옛날엔 무서워 할 수 없이 지키려다가 못 지키고 쓰러졌지만, 이젠 기쁨으로 율법의 계명들을 집어 들고 지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율법의 의를 지킵니다. 그러다 못 지켜도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십자가의 은혜와 은총으로 우리 마음은 평안하고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구약을 율법을 읽을 때 두려움으로 읽지 말고, 재미있게 읽고 자신감을 갖고 율법을 대해 보십시오. 그러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사랑앞에 더욱 더 무릎을 꿇고 감사와 찬송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율법의 요구를 온 몸으로 맞으시고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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