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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부 3장 : 마음에 심긴 씨앗 | 임병욱 목사 | 2024-1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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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18-20절 개역개정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파리 대학 총장 니콜라스 콥의 총장 취임 연설문 파동으로 인해 도망자 신세가 된 조숙한 천재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을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개혁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면서 로마 카톨릭교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합니다. 이 때가 1536년,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습니다. 그 후 칼빈은 총 네번의 수정 중보판을 거쳐(41년,43년,45년,49년) 그가 죽기 5년 전인 1559년에 기독교강요 최종판을 발행합니다. 최종판을 내 놓았을 때 세상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습니다. 이 최종판은 전체를 4부로 나눴는데 초판의 교리문답 형식을 탈피하고 모두 80장으로 구성합니다. 제1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2부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제3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편인 성령에 관한 지식, 제4부 외적인 은혜의 수단인 교회들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최종판에서 예정 교리는 구원을 다루는 제3부에 넣었고,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는 제1부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것은 제3부에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했습니다. 이 최종판은 기념비적인 걸작으로 대 성공을 거두었으며 개혁교회의 신학적 총체로서 지금도 세계의 언어로 계속 번역되고 있습니다.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23년에 걸쳐 출판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우선 고난의 열매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로 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는 가운데 도망, 가난, 질병, 오해, 아들과 아내의 죽음, 그리고 로마교회와 이단들과의 피곤한 싸움으로 평생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한 가운데서 얻은 고난의 열매입니다. 그는 기독교강요만 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책들을 썼고 특히 요한계시록을 뺀 성경 전체에 대한 탁월한 주석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출판한 것이기에 기독교강요는 그의 놀라운 애정과 열정과 수고가 담긴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26세에 썼던 초판의 내용과 그가 완숙해진 경지에서 쓴 최종판의 내용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에 가까운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신학이 오직 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많은 성경 해석들이 인간의 철학에 기반을 둔 사람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지만, 칼빈의 신학과 성경 해석은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바로 이 원칙에 의한 성경 해석이기 때문에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모든 개혁 신학의 총체(SUMMA)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거듭나게 하는 어머니가 된 것이지요.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아는 지식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의 뿌리가 깊을수록 큰 경건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3장 ‘마음에 심긴 씨앗’입니다. 씨앗이 뭡니까? 곡식이나 식물의 씨이지요. 매우 작고 보잘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씨앗은 일단 땅 속에 묻히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조그만 몸 속에서 쑥하고 싹이 나오고, 잎이 나고, 금새 줄기가 솟아 올라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 조그맣던 몸은 온데 간데 없고 커다란 식물이나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열매까지 주렁주렁 맺힙니다. ‘사과 한 알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한 알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처럼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진리, 한 알을 심으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는 진리가 바로 씨앗에 담겨 있는 진리입니다. 씨앗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이루기 위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씨앗을 사람의 마음 속에도 심어 놓으셨습니다. 두 가지 씨앗이지요. 하나는 ‘종교의 씨앗’이고, 다른 하나는 ‘양심의 씨앗’입니다. 다른 말로 ‘종교심’과 ‘양심’이라고 합니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도 있습니다. 이 씨앗에서도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상상 못할 만큼 커다란 나무를 만들어 냅니다. 종교의 나무와 양심의 나무이지요.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그 마음에 종교심과 양심의 씨앗을 심어 놓으셨을까요?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종교심을 심어 놓은 것은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마음껏, 풍성하게 경배하고 예배하며 찬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하나님께로 오는 길을 알려 주고, 하나님을 온 몸과 마음으로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종교심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양심을 심어 놓으신 것은 자기 삶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는지 않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곧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경보기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이 심겨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결정적인 증거가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 사진들을 보세요. 여러 나라 여러 사람들이 만든 종교의 나무, 종교의 열매들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그 것은 다 하나의 씨앗, 종교의 씨앗에서 자란 것들이지요.
얼마나 열심입니까? 왜 사람들이 이 지경까지 열심일까요? 그 마음속에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자꾸 싹을 틔워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종교없는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800만이라고 합니다. 신들의 수가 서울 시민 수 만큼 많은 것이니까 얼마나 일본 사람들은 종교심이 많은 것일까요. 세계 어디에나 종교는 있고 또 다 다르고 독특합니다.
왕은 자기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칼로 찢어서 피를 냈고. 왕비는 혀를 뚫어서 피를 냈습니다. 그 피를 받아다 매년 정기적으로 신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전쟁에서 잡아 온 포로들은 운동 경기를 시켜서 진 팀 전원의 팔 다리를 자르고, 심장을 도려 내여 신에게 바쳤습니다. 어린 소녀들을 뽑아서 정기적으로 죽여 자기 신에게 바쳤습니다. 신이 화나지 않도록, 신의 기분을 맞춰 주어 자기들을 공격하지 않고, 비를 주고 해를 주고 풍성한 곡식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심지어 신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자기의 갓난 아기들을 산채로 불에 던져 죽였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하고 악합니까? 그러나 이것도 그들에겐 종교였습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열심이었을까요? 해답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엔 신을 찾고, 신의 의지하려는 종교의 씨앗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엔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야 신이 어디있어? 신은 없어. 난 하나님을 안 믿어---그러는 그 사람의 마음 속에도 종교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주먹이라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돈이라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기 주먹이 자기에게 신이고, 돈을 믿고 사는 사람은 돈이 자기에게 종교가 되는 것이지요. 짐승에게는 이런 종교의 씨앗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동물원의 원숭이들이 예배드렸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길거리를 지나가는 개들이 모여 기도회 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오직 사람만이 신을 찾고 신을 의지하고 신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속에만 신의식, 곧 종교심을 심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은 사람이 짐승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놓으시고, 우리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두번째, 세상에 가득한 도덕과 윤리, 법과 규칙은 사람들의 마음에 양심의 씨앗이 심겨졌다는 증거입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법과 규칙을 어기면 부끄러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왜 밤에 몰래 쓰레기를 버릴까요? 다음 셋 중에 하나 골라 보십시오. 1)밤이면 해가 지고 달이 뜨기 때문에 만유인력이 약해져 쓰레기 무게가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2)낮에 쓰레기를 버리면 집 안에 있던 복이 나가고 밤에 버리면 옆 집에 있던 복까지 우리 집으로 들어 오기 때문이다. 3)남에게 들킬까봐 무섭고 부끄러워 그러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법과 규칙을 어기면 부끄럽고 처벌을 무서워 하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그 마음 속에 양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 무서워하고 부끄러워 합니까? 잘못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짓이 나쁜 짓이다 악한 짓이다 하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이것이 없으면 무서워 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 할 것도 없지요. 이렇듯 지금 하는 짓이 옳은지 그른지, 바른지 악한지를 알려주고, 나쁜 짓이요 창피한 짓임을 가르쳐 주어 바르게 행동하게 하는 것이 바로 양심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종교심은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네비게이션 같은 것이고, 양심은 선하고 악한 것을 가르쳐 주는 경보기 같은 것입니다. ‘양심에 털났다.’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죄를 짓고서도 무서운 줄을 모르는 것이지요. 잘못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양심이 없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 즉시 우리 사회는 동물의 왕국이 됩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셨지요? 사자나 호랑이 같은 힘 있는 것들이 양이나 얼룩말 같은 힘 없는 것들을 마음대로 잡아 먹습니다. 힘이 있으니까 자기 욕구와 욕망대로 행동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 마음 속에 양심이란 것을 주셔서 힘 있다고 그렇게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해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자기 욕망과 욕심을 제어할 수 있는 그 양심의 힘으로 사람들은 이렇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에 있는 양심에서 도덕과 윤리 그리고 법과 규칙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으로 서로 서로 해치지 못하게 했고, 서로 도와가며 살도록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양심의 힘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사람 마음에 종교심을 심어 주셨다고요?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심긴 종교의 씨앗은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열매를 맺는 나무로 자라야 합니다. 그러면 양심은 왜 주셨을까요? 성경 말씀을 알고 그대로 지켜 살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겁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의 양심이 먹고 마시는 밥이요 물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성경이 옳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나쁘다 하는 것을 나쁘다 할 줄 알아야 비로소 바른 나무로 자라서 바른 도덕과 윤리와 법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사람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과 양심의 씨앗이 심겨져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미생물에서 원숭이로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만 종교가 있고, 사람만 윤리 도덕이 있습니다. 서울 대공원이나 에버랜드의 원숭이들이 통성기도하고, 애완견 센터의 개들이 예배드리는 것 보셨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동물들에겐 종교도 도덕 윤리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종교심으로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의 그 양심으로 성경 말씀을 지켜 사는 것이 그래서 행복이요, 성공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매일 매일 성경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마셔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종교의 씨앗과 양심의 씨앗이 건강하고 무럭무럭 자라서 우람하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는 종교의 나무, 양심의 나무로 자라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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