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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부 8장 : 태양과 반딧불 임병욱 목사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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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베드로전서1:24-25절 개역개정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6월 24일 월요일

 종교개혁의 가장 큰 의의는 부패하고 타락한 로마 카톨릭의 발 아래 있던 성경을 다시 성경의 위치로 올려 놓은 것입니다. 교회의 입맛대로 휘둘리던 성경의 권위를 되찾은 것이지요. 바로 그 놀라운 일의 완성이 칼빈의 기독교강요입니다. 

오늘은 기독교강요 18장 성경의 신뢰성과 신비성에 대한 이야기를 태양과 반딧불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묵상합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한 여름 밤 반딧불로 공부하고 한 겨울 밤 눈빛으로 공부해서 성공했다는 말이지요. 반딧불이 밝기는 밝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천장에 달려 있는 저 등을 형광등(螢光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반딧불이 밝다 해도 그 밝기를 태양 빛과 견주겠습니까? 비교 하는 자체가 태양을 모독하는 것이지요. 태양은 태양계 총질량의 99.9%를 차지하며, 크기는 지구의 109배나 됩니다. 커다란 수소 가스 덩어리인 태양은 수소의 원자 핵끼리 결합하여 헬륨원자로 변하는 핵융합 반응을 통해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데, 그 크기는 현재 세계 총 에너지 수요의 약 60조 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이 가운데 약 1/22억 만이 복사의 형태로 지구에 보내지는데, 이것만으로도 세계 총 에너지 수요의 약 3만배가 된답니다. 1520분 동안의 쏟아지는 태양 에너지로도 세계의 총에너지가 공급되는 셈이지요. 이 정도라면 사람들이 태양을 신()으로 착각할 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태양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래서 반딧불이 아무리 밝다 해도 그 밝기를 태양과 견줄 수는 없지요.

세상엔 참 아름다운 표현과 반짝이는 지혜를 담은 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데카르트,칸트,헤겔,공자,맹자,주자,왕수인,노자,장자,석가,퇴계,율곡 등등 너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책들은 성경에 비교하면 반딧불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세상에 가득한 모든 책들에 비하면 태양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세상의 모든 책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우선 감동을 주는 면에 있어서 성경은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성경의 언어들은 매우 아름답고 뛰어난 표현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수수하고 겸손한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평범한 언어로 하늘의 고귀한 진리를 분명하고 힘있게 전달하고 있다는 그 자체로 벌써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기록된 책임을 충분히 증명합니다. 사람들의 현란한 수사학이 필요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노자를 읽어보십시오. 그 반짝이는 지혜와 놀라운 발상들이 여러분을 매혹 시키고 감동을 주고 때론 황홀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들의 글을 다 읽은 다음 이번엔 성경을 펼치고 읽는데 전념해 보십시오. 아마 그러면 어느새 세상 책들이 준 감동의 빛들은 소리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감동은 우리의 가슴을 치고 영혼을 흔들며 골수에까지 새겨집니다. 그것은 세상 어떤 책이 주는 감동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또 글의 내용에 있어서도 성경은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 중에 그 사상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아하고 명쾌한 문장의 선지자는 물론 수수하고 평범한 문장의 선지자도 모두 그들의 문장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사상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어린 아이 아니면 바보 천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들의 교훈을 별 것 아니라고 쉽게 무시하는 사람은 그 내용을 평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미친 사람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전성과 역사성에 있어서도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희랍의 저작이나 애굽의 신화들이 오래 되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모세 시대보다 훨씬 뒤의 것들 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자기보다도 수백 년 전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약속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입니다(17:7). 이미 그 만큼 오래된 약속을 모세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모세는 애굽에서의 생활, 400년 이란 년 수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15:13; 12:40 ; 3:17). 이처럼 모세의 글들은 그렇게 먼 옛날까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실 세상에서 이만큼 오래된 기록들을 찾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요.

또 그 진실성에 있어서도 독특하고 탁월합니다. 모세가 기록한 글들을 보면 성경이 얼마나 정직한 책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300여년 전의 야곱의 예언을 전하면서 자기 종족인 레위 지파에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49:5-6). 모세는 오직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하였습니다.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나 자기 종족의 명예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자기 누이와 형 아론의 사악한 행위를 조금도 가감없이 기록하였습니다(12:1). 또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자기 아들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에 두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스스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기록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수많은 기적과 이적들은 성경의 독특성과 탁월성을 확증합니다. 성경처럼 이적이 많이 기록된 책이 아마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성경의 이적들은 많습니다. 모세만 해도 애굽을 친 열 가지 재앙이라든지,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물이 솟았다든지(20:10-11),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다든지(11:9), 홍해가 갈라졌다든지(14:21) 등등 세상 사람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이적들을 성경은 대수롭지 않게 막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은 모세가 바로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거짓말로 사기 친 것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인도해야 했던 백성들은 목이 곧고 쉽게 믿지 않고 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모세가 실제하지도 않은 기적들로 사기치면서 설득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오히려 그 반대임을 증명해줍니다. 모세의 기적들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그 정도로 완고한 백성들도 모세를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기적들이 마술이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세상 어느 마술이 40년 동안 매일 만나를 비 같이 내리게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루 정량을 초과한 만나는 썩어버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이적과 기적들은 성경이 사람의 작품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언과 성취라는 놀랍고 탁월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예언과 성취의 구조는 다른 모든 책들과 비교를 거부합니다. 성경의 예언은 기적 만큼이나 많습니다. 어쩌다 한 두 가지 대강 들어 맞는 그런 예언이 아닙니다. 정확하고 또 수 십년 수백 년 전의 예언이고 또 어떤 것은 이중 삼중으로 예언 되기도 합니다. 모세는 수 백년 전의 조상 야곱의 예언을 소개하면서 유다 지파에서 왕이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또 다시 모세로부터 400여년이 지나서야 성취됩니다(삼상16:13). 또 모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 올 것을 예언하기도 하는데 그것도 2천여년이 지나서 그대로 성취됩니다(49:10;10:1). 이사야는 평안할 때 전쟁에 대해서 예언합니다(39:6-7). 뿐만 아니라 고레스란 사람을 통하여 해방될 것까지도 예언하는데 이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나서 그대로 성취됩니다(1:1-4). 또 예레미야는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까지 예언합니다(25:11-12;29:10). 그리고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다니엘은 약 600년 후에 있을 세상의 일들을 마치 눈 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예언합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세상 역사는 흘러갑니다. 세상 누가 있어 이런 예언을 하고, 그리고 수십, 수백년이 흘러 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답니까? 이 정도로 예언에 자신이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기적적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세가 실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나폴레옹이 실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은 자기의 미련함을 스스로 고백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 민족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살았다는 것은 모세가 실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기적적으로 보존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통해 보존하려 하셨으나 어떨 때에는 그들이 게을러서 잠시 파 묻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율법을 발견해 낸 후로부터는 대대로 잘 계승될 수 있었습니다(왕하22:8 ;대하34:15).

마카비서(마카비전서1:56-57)에 보면 안티오쿠스가 모든 율법책을 다 불태우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록을 근거로 성경은 그 때에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 박해가 가라 앉자 마자 성경은 즉시 다시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어떤 공장에서 그렇게 빨리 그 많은 사본들을 위조해 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경건한 제사장들과 성도들에게 아주 강한 믿음을 심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그 보물을 캐내어 지키고 후손들에게 전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가 그렇게 없애려고 했지만 그 뒤 곧 이어 헬라어 구약 성경이 만들어졌고 전세계에 보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위대한 교리를 바로 그리스도의 최대 원수인 유대인들을 통해서 보존하신 것이지요.

이 뿐만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단순성에는 신적권위가 충분히 나타납니다. 세상의 많은 거만한 사람들이 첫 세 복음서의 문체가 평범하고 너무 단순하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복음서들의 내용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기만 해도 금방 자기들의 경솔함에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간단 명료하게 요약하여 전달하는 그 복음서의 기록들은 세상 어떤 책들이 흉내내지 못할 단순 명료함과 위엄을 갖습니다. 또 요한은 믿지않는 자들의 완고함을 위엄 있게, 그리고 벼락치듯 꾸짖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같은 방법으로 저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주고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주어 조롱을 멈추게 해줍니다. 책상 앞에서 자기 잇속이나 챙기던 마태나, 고기 잡던 베드로와 요한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던 바울이 갑자기 변하여 새 사람이 되고 하늘의 신비한 진리를 장엄하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신구약 성경이 세상에 공포된 이후 수많은 세상 지혜자들이 성경을 대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장구한 세월동안 성경은 세계 모든 곳의 교회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은 거룩한 일치로서 그 자체가 참으로 기적적이고 감동적인 사실인 것입니다. 또 성경은 수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된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성도들이 성경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쳤습니다.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밝힌 몇 가지 사실들만 가지고도 성경이 세상 모든 책과 달리 얼마나 독특하고 또 얼마나 탁월한지를 확실히 증거해 줍니다. 거기에 더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에 대해 확실히 증거만 해 주신다면 위의 증거들은 더욱 대단히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증거들을 가지고 불신자에게 성경의 권위를 설득시키려 든다면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지식이기 때문이지요. 오직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에 우리 각 개개인을 믿음으로 초대합니다.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고, 우리를 인간다운 인간, 즉 온전한 사람을 만드는 성령의 은혜에 참여하라고 초대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으라고 초대합니다. 어느 인생이든 이 경험이 없으면 시체일 뿐입니다. 아니 시체만도 못합니다. 둘째는 범사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초대합니다. 그냥 착하게 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여 영화를 누리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성령의 초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초대입니다. 영원토록 범사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예수님처럼 상처 받은 세상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믿고 배우고 가르치고 전하고 순종하면, 그렇게 하는 동안, 먼 옛날 천지를 지으신 그 말씀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를 책망하고 격려하고 교육하고 위로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놀라운 새 창조와 구원 운동에 동참하라고 초대합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꿈이고, 바로 종교입니다. 이 경이로운 대 역사의 무대에 구경꾼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되라고 성경은 초대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깨우치고 확신하여 갈 때 비로소 사람들에게는 신비로운 에너지, 그 무대의 등장인물이 되어 한 몫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생각도 변하고 눈도 커지고, 마음도 뜨거워지고, 문이 열리고 길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5: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성경의 독특성과 신비성입니다.

불후의 명작 벤허(Ben Hur)’를 남긴 작가 윌리스(Lewis Wallace 1827-1905 미국의 소설가, 정치가, 군인. 대중소설을 씀)는 본래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신자였고 기독교가 필요없음을 강조하고 공박하였다지요. 그래서 그는 성경의 허구성을 철저하게 밝혀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펴내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했답니다. 그는 성경에서 잘못되고 거짓된 부분을 발견하려고 눈을 번득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속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 속에 내재해 있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험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씀에 이르러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감격한 월리스는 영원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된 후 기독교를 비판하려고 했던 펜을 꺾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에 입각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리며, 많은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한 불후의 명작 벤 허’(부제는 그리스도의 이야기 A Tale of the Christ)’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객관적으로도 성경은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탁월하고 또 그 권위에 있어서 독특합니다. 성경이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객관적인 특징들은 사람의 이성으로만 보아도 독특하고 탁월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분명한 권위마저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밝은 대낮에 반딧불이를 찾아서 그 꽁무니를 따라 다니느라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 없이 공부하고 장사하고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반딧불로 길을 비치며 밤길을 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함께 살려는 사람들은 태양 빛 아래서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다닌다고 말만 하지말고, 믿음이 있다고 자랑만 하지말고 오늘부터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그 탁월성과 신비성에 매료되어 감동을 받을 뿐만 아니라 성경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만나서 영생에 이르는 복을 누리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성경을 열고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할 때 성경을 덮으며 마감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삶의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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