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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부 11장 : 맹인 코끼리 만지기 | 임병욱 목사 | 2024-11-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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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레위기26:1절 개역개정1.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우리말 속담에 ‘맹인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시각 장애인들을 낮추려는 말이 아닙니다.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각 장애인들이 코끼리의 여기 저기를 만져 보고는 나름대로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일부분만 알면서 전체를 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제 멋대로 진실을 왜곡하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해대는 엉터리들을 빗대어 하는 말이지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이런 저런 모양의 형상으로 표현해 보려는 사람들이 꼭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이와 같다고 비난합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태로 표현하려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우상을 만드는 자는 참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집요하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어떤 형태의 조각이나 그림이나 형상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 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인위적으로 만든 실체하지 않는 신’이라는 말이지요. 물론 성경은 참 하나님을 거짓 신들과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켜 설명하기도 합니다. 허나 이것은 어리석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시키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우상에 대하여 갖는 태도는 아주 분명합니다. ‘어떤 형상이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곧 그것은 불경건한 속임수가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은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태양과 별들로, 이집트 사람들은 동물들로, 그리고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각각 신을 형상화했습니다. 동물보다는 사람이 좀 나은 것일까요? 성경은 그런 형상들, 곧 우상들을 서로 비교해서 어떤 것은 좀 낫고 어떤 것은 더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형상이나 화상(畵像)들을 하나도 예외 없이 거절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5여호와께서 호렙 산 불길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어떤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16그리하여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해 어떤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지 말라 남자의 형상이든지, 여자의 형상이든지, 17땅 위에 있는 어떤 짐승의 형상이든지, 하늘을 나는 날개 가진 어떤 새의 형상이든지, 18땅 위에 기는 어떤 곤충의 형상이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어족의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 19또 그리하여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4:15-19; 출20:4) 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사46:5-7; 40:18-20; 41:7,29; 45:9).“5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7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바울도 똑같은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행17:29)“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나신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구름과 연기와 화염’이 나타나기도 했고(신4:11),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기도 했고(마3:16), 때로는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시기도 했습니다(창18:2).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순간적인 상징’들로 오히려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어떤 형상으로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 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임하셨던 것은 하나님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계시하실 것임을 미리 알려 주는 서곡과 같은 것이지요. 예루살렘엔 성전은 이방인이 들어 올 수 있는 곳, 이스라엘이 제사 드리는 곳, 제사장만 들어 가는 곳, 제사장도 함부로 못 들어 가는 지성소 등으로 다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실제 거기에만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성소 앞에는 휘장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들어 가면 천사들이 자기 날개로 속죄소를 가리고 있습니다. 왜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못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의 속죄소는 들여다 보지 못하도록 휘장으로 가리워졌고, 속죄소의 그룹들은 날개로 또 그 속죄소를 가리고 있습니다(출25:20). 이사야가 본 천사 스랍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사6:2). 그 지성소의 속죄소에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죄인을 대신해 죽임 당하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서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어야만 속죄소, 곧 하나님의 임재의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까? 함부로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에피큐로스 학파의 한 시인은 이런 시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 나는 / 무화과 나무의 줄기, 쓸모 없는 나무 조각이었네 / 공장(工匠)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 마침내 /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말 그대로 이지요(사44:12-17).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하려는 어떤 조각이나 어떤 그림이든 다 정죄합니다. 그런데도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우상은 무지한 자들을 위한 참고서’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상은 무지한 자들을 위한 참고서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말은 정말 무지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레고리우스의 말과 정 반대입니다. (합2:18).“18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락탄티우스(Lactantius), 유세비우스(Eusebius), 어거스틴(Augustine) 등도 다 형상에게 예배 드리는 것 뿐 아니라 그 형상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사실 그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있었던 엘비라 교회 회의(the Council of Elvira) 의 다음과 같은 결정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이 있어서는 안 되며, 벽에 예배를 받거나 찬양 받아야 할 것이 그려져서도 안 된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도 바르로(Varro)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모양을 새긴 조각이나 그림들을 처음 소개한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오류가 증가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하거나 심지어는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주의자들은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성당의 벽면이나 천장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사건과 이야기들을 조각과 그림으로 표현해 냈습니다. 심지어 마리아 상이나 수많은 성자, 순교자 상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곤 사람들이 너무 무식해서 글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그림과 조각 등으로 성경을 가르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상이야말로 ‘무지한 자들을 도와 하나님을 이해하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요, ‘성결의 책’이라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술 작품을 통해 하나님을 가르치겠다는 것은 무식의 소치요, 무지의 산물일 뿐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형상이나 우상이 교회 교사들의 임무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무식의 소치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자신들이 성경을 모른다는 것을 감추려는 시도요, 사람들에게 성경 대신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하려는 사악한 짓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회중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제대로 밝히 가르쳤더라면 그렇게 무식해졌을까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롬5:10)“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수천 수만개의 돌과 나무 우상들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교황주의자들은 말씀과 성례를 통한 공통된 교리로 모든 교회를 밝히 가르치고 든든히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자꾸 우상만 만들어 내려는 것일까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모르는 자신들의 무지와 무식을 덮으려는 것이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말에 순종케 하려는 것 밖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말에 순종케 하려는 사악한 짓입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닌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지요. 부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십자가 상이나 형상들에 훨씬 더 집착하는 존재인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상물의 사용은 타락한 본성에서 난 것이며 마침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교만과 무모함으로 가득 찬 사람의 마음은 감히 신의 모습을 상상해 내고, 또 그 상상해 낸 그 신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보려고 애씁니다. 마음으로 잉태하고 손으로 출산해 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단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신의 어떤 능력이 그 속에 내주한다고 스스로 여기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을 숭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곧 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금방 눈에 보이는 우상에 미혹되고 얽매이게 되는 것이지요.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상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사람치고 그 우상이 자기 기도와 예배를 받아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교황주의자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상에게는 봉사(dulia)하는 것이지 예배(latria)하는 것이 아니라고 둘러 댑니다. 그러나 그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희대의 망언처럼 말입니다. 하여튼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처음 500년 동안에는 교회에 아무 형상물도 허락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그 순수성을 잃어감에 따라 형상물들이 교회에 들어 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AD.787년)에서는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것을 법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우상을 만들고 숭배하고 싶은 열정 때문에 겁도 없이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제 멋대로 해석해 버렸습니다(창1:27; 아2:14; 요일1:1;시99:5). 아모리 감독 데오도시우스는 형상 예배를 싫어하는 성도들을 파문시켜 버렸습니다. 또 그들은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도 형상 반대자들이 더 나쁘다. 그리스도의 상(像)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드리는 자는 모두 기뻐 날뛰어라.’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내 뱉았지요. 우상에게 미혹되어 미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그림, 모든 조각, 모든 동상이 다 우상은 아닙니다. 어떤 것은 예술이고 또 문학일 수 있습니다. 예술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은 은사입니다. 그러나 조각이든 그림이든 형상으로 표현할 때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건이나 사물들만을 표현해야 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하거나 자기 필요를 위해서는 안 됩니다(출20:4).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들이나 또는 상징과는 아무 상관 없이 단순한 자기를 위한 형상이나 형태를 표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전자는 교육에 다소 유익을 주지만, 후자는 쾌락 외에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예술이 말씀의 지도를 받지 않을 때는 항상 죄악에 빠질 가능성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언제든지 그것들은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경배를 받고 찬양과 기도의 대상이 되려는 것들은 다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형상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명령하신 이유는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상상력이 말씀을 넘어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거나 타락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람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맨 눈으로 태양을 노려 보다간 눈이 머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즉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눈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으로 보는 분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분입니다. 아니 이미 말씀 속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은 충분히 보여지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기 보다는 화려한 미사려구를 동원하여 설교하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 이야기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자들이나 감동적인 예화 몇줄로 복음의 말씀을 대신하려는 자들은 자신들도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을 모를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우상 공장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신을 상상해 내고, 그렇게 상상해 낸 신들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기대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하나님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상이 될만한 모든 것들을 금지시키셨습니다(출20:4). 세상 것들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설명해 내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시킨 것이지요. 우리는 우상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하나님을 배우도록 작정되었습니다. 우리는 우상 공장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면 성령이 역사하여 그 말씀의 진리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9-11)“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게 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십자가 구원을 통해 우리에게 참 믿음을 주셔서 참 하나님께로 나가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십시다.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 중에서 훌륭한 작가 미술가가 나오길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도 우상 숭배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떠나 하나님을 형상화하려는 것은 ‘맹인 코끼리 만지기’일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직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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