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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1부 12장 : 바람 난 아내 임병욱 목사 202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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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신명기6:4-9절 개역개정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마태복음4:10절 개역개정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6월 28일 금요일

호세아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취해서 자식을 낳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피우는 여자, 즉 바람 난 아내입니다. 바람 난 아내가 누굽니까? 남편을 두고 있으면서도 자기 욕망과 정욕을 다스리지 못해서 창녀처럼 다른 사람들과 몸을 섞는 여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런 지저분한 여자를 찾아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으라고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하게 하시는 걸까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정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행위를 하고 있는 그런 여인처럼, 지금 북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망과 정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방 신들과 우상들을 섬기는 행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 고멜을 아내로 삼아 결혼하고 살라는 말씀을 통해서 연극으로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닌 이방 신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음행이라고 표현합니다. 메타포(은유)이지요. 이런 개념들은 성경이 공들여서 만들어 내는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런 은유가 모이는 곳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은 성경이 공들여 만들어 낸 다양한 은유들로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지키도록 해 줍니다. , 말세를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음행이라고 말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어 하나님을 떠나게 유혹하는 세상 것들에 대해 음녀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오늘 기독교강요 112장에서 존 칼빈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우상을 섬기는 교황주의자들을 향해 바람 난 아내라고 실랄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이스라엘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는 마치 굴레를 벗어 던진 소나 말 같다고 합니다부부 간에는 사랑의 굴레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굴레는 부부가 서로의 사랑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속박하는 특별한 제한들입니다. 예컨대 부부끼리만 주고 받을 수 있는 마음 속의 정(), 또는 외적으로 행하는 입 맞춤 등 특별한 사랑의 행위들이지요. 마음이든 행위든 그런 굴레들을 벗어 던지는 순간,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자기를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수많은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다 바람 난 아내, 바람 난 남편과 같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요, 우상은 우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을 곧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말은 남편을 배반하지 않고도 바람 피울 수 있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우상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 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조금이라도 우상과 함께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은 옛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BC.106~43)의 말부터 끌어 와서 종교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비틀어서 참 종교를 무시합니다. 키케로는 그의 책 신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종교를 뜻하는 라틴어 렐리기오(religio)어떤 것에 마음을 집중한다.’ ‘무엇을 세심하게 고려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렐레게레(releg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로 보고 종교를 신들에게(또는 신들의 말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350년 후 초기 기독교 신학자였던 락탄티우스(AD.240~320)렐리기오결합하다’‘단단히 묶다라는 뜻을 가진 렐리가레(religare)’에서 나왔기 때문에 종교란 신과 결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이 정의를 수용함으로써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의 의미가 굳어졌습니다. 곧 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교황주의자들은 그 종교의 의미를 축소해서 설명합니다. 참 종교는 진리를 알기 위해 신과 결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그러나 그것은 경박한 억지에 불과합니다

원래 종교라는 말은 헬라 말 '유세베이아(eusebeia,경건. 10:2,7; 딤전2:2; 3:16; 4:7,8)'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를 복종하여 드리는 온전하고 흠이 없는 경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참 예배자는 '자기를 복종하여 온전하고 흠이 없는 경배를 드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그 복종이 '굴레'라는 것입니다. 곧 부부간에는 사랑의 굴레가 있어야 하듯이 참 예배자는 굴레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참 종교는 '유세베이아(경건)이라는 말에서 그 의미를 가져와야 합니다. 곧 경건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스스로 자기에게 적당한 굴레를 씌우는 태도와 행위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받으셔야 합니다. 곧 참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 이래 모든 시대에 있어서 종교가 타락해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와 영광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만약 사람들이 자기를 가짜 신들과 혼동한다면 가혹하게 복수하실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20:5). 동시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순종해서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수 있도록 바른 예배 방식을 만들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어쨌든 하나님은 율법에 다음 두 가지를 확실히 포함시키셨습니다. 첫째는 오직 하나님만이 신자들에게 율법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 스스로 자신이 경배 받으실 적당한 방법을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잘못된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굴레를 씌워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위한 율법의 굴레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신명기 4:6-9)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교황주의자들은 교활합니다. 그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만든 우상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긴다고 까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신이고, 자기들이 만든 신들이나 우상들은 하나님 보다는 훨씬 못한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돌려져야 할 영광과 성품과 찬양을 빼앗아 그 많은 잡신들과 우상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나 심지어는 자기들이 만든 성자(聖者)들을 하나님과 비슷한 위치로 높여 하나님 대신 영광과 찬양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런 우상숭배자들의 음모는 남편을 남편 대로 두고 다른 남자들을 사랑하는 바람 난 아내의 사악한 행동과도 같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교황주의자들은 '종교'와 '경건'이라는 말을 교묘하게 비틀어서 자기들을 합리화힙니다. 특히 라트리아(latria/예배)’둘리아(dulia/공경)’를 애써 구별합니다. 하나님께는 라트리아(latria/예배)’를 드리고 우상들에게는 둘리아(dulia/공경)’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상숭배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악한 속임수입니다. 그런 말장난으로 하나님께만 드릴 영광을 천사와 죽은 자들에게 드리는 자기들의 그 역겨운 죄를 가리워 보려는 것이지요. 문제는 말이 아니라 저들의 마음과 그 행위에 있습니다. 저들의 마음과 행위를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말로는 남편과는 사랑을 나누고 다른 남자들과는 우정을 나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남편과만 나눌 사랑의 행위를 다른 남자들과 나누는 바람 난 아내의 그것과 같은 것이지요.

사실 언어적으로만 보아도 교황주의자들, 곧 우상숭배자들의 말은 엉터리입니다. 그것은 둘리아(dulia/공경.섬김)’라트리아(latria/예배)’보다 그 범위가 훨씬 더 큰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경(섬김)'이라는 말 속에는 경배와 예배라는 말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경배'하고, 우상은 '공경'한다고 하면, 우상들에게는 더 큰 것을 드리고 하나님께는 더 작은 것을 드린다는 것인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므로 예배‘공경(섬김)이란 말은 실제 별 차이가 없는 말이고, 또 차이가 있다면 오히려 '공경(섬김)'이 예배보다 더 큰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은 우상 앞에 절하는 것(둘리아/공경.섬김)과 하나님께 절하는 것(라트리아/예배)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공경(섬김)과 예배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는 것이 곧 공경(섬김)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사탄이 시험하지요. (4:9-10)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10...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다만 그를 섬기라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경배섬김(공경)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사탄에게 단 한번이라도 절 하는 것(경배)은 곧 하나님께 드릴 경배와 섬김(공경)을 도적질 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공경(섬김)한다 하면서 종교적인 의미가 담긴 을  행하는 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람 피는 것이지요. 공경(섬김)이든지 예배든지 그것은 신자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천사 앞에 무릎을 꿇으려다 책망을 받습니다(19:10;22:8,9). 사도 요한이 하나님께만 드릴 경배를 천사에게 드리려고 했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천사 앞에 무릎 꿇으려 한 것은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은 것입니다. 이런 예는 사도행전의 고넬료와 베드로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10:25). 고넬료가 자기와 가정을 구원한 베드로에게 감사하여 베드로에게 절 하려고 했지요. 베드로가 급히 고넬료를 막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와 하나님을 착각해서 그랬을까요? 설마 그 정도로 그가 무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를 공경(섬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약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사람에 대한 예배를 혼동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기를 원한다면 다음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 만큼이라도 손상 시켜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대로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외국인이 북한을 방문하면 무조건 김일성 동상 앞으로 데리고 가서 절하라고 한답니다. 한 때 남한의 많은 목사님들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 앞에서 절을 했다지요. 김일성을 공경하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 마음에 김일성을 하나님과 같은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동상 앞에 절을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을까요? 절이란 것은 그저 사람 사이에 서로 인사를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김일성 동상에게 절 하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절을 하는 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우상에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의 굴레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수많은 우상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리아 상 앞에서도 기도를 하게 하고, 마리아에게 경배를 드립니다. 성자들 동상 앞에서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황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경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들을 하나님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보인줄 아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다. 우린 그저 여러 형상들에게도 '존경의 의미'로 절을 하고 경배를 드린다.’ 여러분, 이게 바로 바람 난 겁니다. 아무나 붙들고 뽀뽀하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 내 아내라는 게 아니야, 내가 당신과 뽀뽀 한다고 당신이 내 남편이란 게 아니야.’라고 한다면 그걸 어찌 이해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바람 난 겁니다. '공경(섬김)속에는 경배와 감사와 찬송과 기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경배와 찬송과 감사와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나 형상들에게 드리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에 대해 분명히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고린도전서10:20-21)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렇습니다. 신앙은 겸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공경)과 경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둘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마음도 둘로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태복음 6:24)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만 의지한다고 하면서 물질을 의지하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 섬김다고 하면서 물질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만 드릴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우상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곧 바람 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오직 하나님께만 내 경배를 드린다. 내 찬양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린다. 내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린다. 내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린다. 나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다.’ 이렇게 결심하고 그렇게 결심한대로 살면 하나님이 그 인생을 아주 기뻐하고 사랑하십니다. 청소년 때 바벨론이란 강대국에 포로로 잡혀간 귀족 소년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그렇게 결심하고 결심한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지혜와 학문과 권세를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나 더 주시고 열배나 더 해주셨습니다. 부모도 다 잃고 전쟁 포로로 잡혀간 보잘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소년들이었지만, 그들은 바벨론 본토의 쟁쟁한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그들 위에 뛰어난 지도자가 되어 이름을 빛내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습니다.

남편을 배반하지 않고 다른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듯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우상을 섬길 수 없습니다. 유치한 말 장난으로 바람 난 마음과 행동을 감출 수도 없듯이 우상숭배자들은 말 장난으로 자신들의 바람난 마음과 행위를 감출 수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의 사랑을 순수하게 지켜 나가기 위해 스스로 사랑의 굴레를 쓰듯이 우리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려면 성경이 제공하는 '사랑의 굴레'를 써야 합니다. 경건은 굴레 씌운 말이고 미신은 굴레 벗겨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예배와 섬기는 표현이나 행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 마음에 작정하십시오. ‘나는 오직 참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께만 나의 예배와 나의 찬양과 기도를 바친다. 세상의 어떤 좋은 것도 어떤 힘 있는 것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그 마음과 행동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평생 바람 피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여 다니엘처럼 빛나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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