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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2장 : 쇠고랑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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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7:18-20절 개역개정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10일 수요일

오늘은 22장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의 오성과 이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오성이 분별한 것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는 결박당했다는 내용이지요. 그것을 죄수가 찬 쇠고랑에 비유해 보았습니다.

경찰이 범인을 잡으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쇠고랑, 곧 수갑을 채우는 것이지요. 양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면 아무리 황우장사라도 꼼짝 못합니다. 교도소 안에 있는 같은 죄수라도 아주 질이 나쁘고 사고 칠 위험이 많은 죄수들은 그렇게 손과 발에 쇠고랑을 채워 놓는답니다.

죄의 공격 앞에 참담하게 무너진 인간은 손과 발과 온 몸에 쇠고랑을 찬 죄수가 되었습니다. 불신앙의 수갑, 정욕의 족쇄, 교만의 착고, 방탕의 포승줄, 음란의 쇠고랑에 묶인 인간의 자유 의지는 아주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곧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오성의 능력과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죄 때문에 완전히 결박당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결박당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위험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비열한 핑계이고 다른 하나는 터무니 없는 자랑입니다. 비열한 핑계란, 사람은 원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으니 책임도 없다는 것이지요. 또 터무니 없는 자랑이란, 그래도 사람에겐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선행에 대한 공로가 자기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조금이라도 사람에게서 자유를 인정하려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두 가지 위험을 피할 수 있을까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사람에게는 선이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사방에서 비참한 궁핍함만이 그를 둘러 싸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상실한 선과 빼앗긴 자유를 계속 추구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철학자들도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해왔습니다. 자유의지란 무엇일까요? ‘선악을 분별하는 오성이나 이성의 능력과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오성은 무엇이고 이성은 무엇일까요? 먼저 오성입니다. 오성이란 오감을 통해 느끼고 받아들이는 정보입니다.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오감을 통해 받은 정보를 머릿속에서 , 이게 이런 것이구나. 저것은 빨강이고, 저것은 파랑이구나. 이게 이런 뜻이구나!”하고 구별하는 것입니다. “, 색깔을 보니 저건 똥이고, 저건 된장이구나. 냄새를 맡아 보니 저건 똥이고, 저건 된장이구나.”를 구별하고 이해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오성이 구분한 그것을 판단하고 판별하는 것은 이성이라고 합니다. “, 이게 이래서 똥이고, 된장이구나. 그러면 똥은 된장국에 풀면 안되겠구나.” 하고 판별하는 것입니다. 똥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만, 똥과 된장을 보면 인간이 죄로 인해 부패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연결시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의지입니다. 의지란 오성이니 이성이 구별하고 판별한 것을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이 오성과 이성, 의지가 모두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그 모든 것은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성과 이성은 부패했으며, 의지를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힘으로 택하거나 버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이며, 의지는 때로 감각의 선동을 받아 악한 일을 하기도 하지만, 자유로운 선택 능력으로 모든 일에서 즐겨 이성에 순종하며 결코 그 일에 아무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교부들도 거의 철학자들을 따라갔습니다. 죄 때문에 이성은 중상을 입었고, 의지도 비참한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고 말하면서도 이들 대부분은 자유의지를 어느 정도 인정하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드리자.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제공하실 것이다.’ 제롬(Jerome)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시작하고 하나님께서는 완성하신다. 우리는 힘써 드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 저들은 결국 사람은 감성 부분에서만 완전 부패하고 이성과 의지는 대체로 손상이 없다.’고 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서슴지 않고 인간의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외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욕망이 의지에게 수갑을 채우고 정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기서 해방되지 않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노예 상태라는 것입니다(고후3:17; 15:5). 그래서 어거스틴은 겸손이야말로 기독교의 최대 교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겸손은 교만이나 자랑을 삼가는 정도가 아니다. 겸손은 겸손 외에는 자기가 피난할 곳이 없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인간은 원래 사탄이다. 인간성의 능력을 왜 그렇게 중요시하는가? 그것은 상하고 부서지고 혼란하고 망하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고백이지 그릇된 자기 변호가 아니다.’ 사람이 만약 자유의지를 조금만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게 되고 자기 교만에 빠져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3:5; 17:5).

앞서 1에서 인간의 영혼은 오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성이란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를 가지고 사물을 이해하고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것이고 의지는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먼저 오성, 그 다음 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인간의 오성도 쇠고랑을 찼을까요? 이것은 십계명을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첫번째 돌판인 첫계명부터 네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고 두번째 돌판인 다섯째부터 마지막 열번째까지에 대한 인간의 삶에 관한 지식인 것처럼 오성이 할 수 있는 일도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하늘의 일들에 관해서 지식을 갖는 것이고, 또 하나는 땅의 일들에 대해서 지식을 갖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오성의 역할과 한계를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전혀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 어거스틴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초자연적 천품은 사람에게서 제거 되었으나 자연적 천품은 부패되었다.’ 그렇기에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오성은 쇠고랑을 찬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하늘의 일에 관한 인간의 오성과 의지는 아주 죽어버렸습니다. 반응조차, 관심조차 할 수 없지요. 한마디로 무덤에 누운 시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주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나 관심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에 대한 오성이 살아 있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물을 떠난 고기가 죽어 가느라고 퍼득퍼득 거리면서 물을 찾듯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신을 찾는 것이지, 자기의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참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오성, 이 머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가끔 이방 철학자들이 신에 대해 종교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오성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번개 불빛으로 캄캄한 밤 길을 가려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초자연적 성품은 오직 성령의 특별하신 중생의 은총으로만 회복됩니다(3:5; 고전12:3; 1: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중생의 은총으로만 얻어지는 것이지요(1:13; 6:44; 16:17). 성령으로 거듭난 오성이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 자기의 삶을 새롭게 정리 정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 아래 일에 관한 오성도 아직 사람 속에 살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역시 쇠고랑을 찬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인간 속에 부패한 채 남아 있는 오성은 놀라운 활약을 합니다. ‘하늘의 일에 대해서는 완전 무지하지만, ‘땅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력과 판단력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동물과는 뚜렷이 구별됩니다. 법을 사랑하고 지키려 한다든지, 학술을 연마하고 공예를 발달시킨다든지, 양심을 말한다든지, 여러가지 재능을 발휘한다든지, 가정을 꾸미고 지키며 문화생활을 하고 국가를 이루는 것 등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은 진정한 선을 빼앗겼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성 안에 엄청난 선물을 남겨 두신 것이지요. 그러나 땅 아래 일에 대한 인간의 오성도 역시 쇠고랑을 찼습니다. 왜냐하면 심각하게 부패했기 때문이지요.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이성은 무수한 속임수에 압도되고,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지금 인간이 탁월한 이성과 의지로 구축해 놓은 땅의 일들이 결국 인간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도 판단이 안 된채 행하고 있는 일이기에 좋아보이나 결국 악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겪고 있는 기후위기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악할 뿐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6:5).

그러므로 성령의 빛이 없으면 사람은 암흑입니다. ‘하늘의 일땅의 일도 다 캄캄할 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성의 능력도 성령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회복되는 것이지만, 땅의 일에 대한 오성의 역할도 성령의 일반적인 은총이 아니면 제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 것도 자신에게서 난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고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고후3:5). 그리고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우리는 날마다 계속해서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이해력을 구해야 합니다(119:34,64,124; 1:9-10).

이번에는 의지의 문제입니다. 오성이 분별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선택은 오성보다는 의지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의지는 완전히 부패해서 악한 것 밖에 생산할 수 없을까요? 아니면 아직 썩지 않은 부분이 남아서 약간의 선한 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 성경은 분명합니다. 불가능! 인간의 의지는 든든한 쇠고랑을 차고 있다는 것이지요(3:10이하).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7: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하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 말씀은 이미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투쟁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5:17 참조). 신자들이 끊임없이 느끼는 영육간의 싸움이지요. 이 말씀은 우리 육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7:18). 성령의 은총이 아니면 계속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7:24-25).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을 향한 어떤 선도 선택하지 못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어떤 능력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선을 원하기도 하고 행할 수도 있는 자유를 받게 됩니다. 물론 계속적인 성령의 은총이 있어야 하지요. 아무튼 의지도 오성의 경우에서처럼 오직 성령의 은혜로만 선을 사모하고 선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일에 관해서도 그러고 또 땅의 일에 관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것은 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어거스틴의 말은 아무리 곱씹어봐도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속에 선한 생각, 선한 열정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슴을 뜨겁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고 예배가 즐겁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여러분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에게는 그 선한 일들을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늦기 전에 그 은혜들을 취하며 사십시오. 그것은 이미 여러분의 오성과 의지를 묶고 있던 쇠고랑이 성령의 능력으로 끊어졌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는 그렇게 죄의 쇠고랑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의지를 부어 주십니다.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 선한 것을 선택하게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쇠고랑을 찬 죄인에 불과합니다. 어리면 어린 죄인, 나이가 들면 나이 든 죄인일 뿐입니다. 성령의 은혜 없이 공부하고 나이 먹으면 무엇합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직업을 가지면 뭐합니까? 성공하고 출세하면 뭐합니까? 어떤 직업을 갖든지, 얼마나 성공하고 출세하든지 썩어 냄새나는 죄인일 뿐입니다. 성령님이 날마다 내 오성에 빛을 비추시고, 날마다 내 의지에 빛을 비추시느냐 안 비추시느냐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이 제목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 성령님이시여 제 오성에 빛을 비추소서. 제 의지에 빛을 비추소서. 죄의 쇠고랑을 끊어주시고 해방시켜 주시사 참 하나님과 선악을 바로 분별하고, 그리고 참 하나님과 선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이 기도를 입에 달고 살며, 응답 받아 평생 바른 길 가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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