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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3장 : 열린 무덤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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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10-15절 개역개정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오늘은 2부 3장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인간의 오성과 이성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오성이 분별한 것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는 결박당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서는 무엇이 나올까요? 오직 더럽고 악한 것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열린 무덤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여러분 혹시 무덤이 열린 것을 보였습니까? 무덤 속에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썩어가고 있는 시신과 고약한 냄새, 부서진 뼈다귀들, 꿈틀거리는 벌레들, 음산한 어두움 등 온통 더럽고 무서운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원래 하나님을 닮아 완전하고 선했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로는 타락한 죄인이 되었어요. 본성이 암세포에 정복 당한 것처럼, 악하고 더럽고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열린 무덤처럼 그 속에 죄와 악만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무슨 만화에 나오는 외계인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속 마음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죄 아래 있어 초라하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어느 정도 선을 분별하기도 하고, 선택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이 병들긴 했어도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살아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이 비록 죄를 짓기는 해도 교육을 받고 수양을 하는 대로 성숙할 수 있어서 스스로 충분히 고상한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정신 나간 사람들은 인간이 곧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다 선하다.’고 주장합니다. 미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열린 무덤’이라고 못 박습니다. (로마서3:13-15)“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그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회 칠한 무덤’이라고 욕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했으므로 그 스스로는 전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무덤입니다. 그 속에는 썩는 것과 냄새 나는 것과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요3:6)는 예수님의 말씀이 인간 전체에 대한 설명이라면 인간은 분명 지극히 초라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도 증언하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6-7)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육이란 말이 영혼의 감성적인 부분만 가리키는 것으로서, 고상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 합니다. 사람의 일부만 무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경은 줄기차게 육과 영은 서로 대립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사람에게서 영적인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인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중생하지 않고서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기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직 육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 전체가 다 열린 무덤이란 말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마치 천둥처럼 인간 본성이 얼마나 철저히 부패 했는가를 온 우주에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17:9)“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인간은 좀 심한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아주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고 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끔 우릴 헷갈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특하게도 더러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직 사람 속에는 약간이라도 선한 것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 속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악한 본성을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잠깐이라도 그 은혜의 손을 떼기만 하시면 역시 그들도 마치 미친 짐승처럼 악만을 쏟아 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부패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역사하여 악한 본성을 아주 깨끗하게는 아니고 다만 억제하십니다. 곧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녀들은 중생의 은혜로 그 본성을 깨끗하게 하시고 선을 행하게 하시지만(히9:14), 하나님이 버려두신 자들은 세상을 보존하시는데 필요한 만큼만 저들의 악한 본성에 굴레를 씌워 억제하시는 것이지요. 체면의 굴레, 두려움의 굴레, 양심의 굴레, 남보다 위대해지려는 야망의 굴레 등등으로 하나님은 저들의 죄악을 억제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존경 받을 만한 일을 행하는 것은 그들이 대단히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은총 덕입니다. 간혹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하지요. 자연인들 가운데도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이 애국심, 탁월한 정직성, 뛰어난 지도력 등 정말 존경할만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인들 속에도 스스로 덕을 추구하고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런 문제로 헷갈리면 곤란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서 탁월한 지도자, 혹은 훌륭한 도덕가나 뛰어난 자선 사업가나 등 세상에 있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이나 능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모두 하나님이 이 사회의 보존과 인류의 유익을 위해 특별한 간섭 은총을 주어 세우신 인물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선을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선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 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마치 그것은 제 부모도 몰라보는 짐승 같은 불효자가 자기 옆집 노인을 잘 섬기는 착한 사람이라는 말처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절대 제 힘으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어떤 선이든 전혀 행할 수 없습니다.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 은총 덕분에 타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아닙니다. 곧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죄의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은혜가 있기에 때론 선도 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은총이 없으면 언제든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필연적’이란 말은 ‘강제적’이란 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강제적’이란 말은 누가 힘으로 눌러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필연적’이란 말은 내가 너무나 원해서 그것 밖에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사자를 보십시오. 사자가 풀을 먹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어쩌다 먹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기 덩어리가 자기 앞에서 흔들거리면 사자는 절대 사슴처럼 고개 숙이고 풀을 뜯어먹지 않습니다. 백이면 백 다 고기에게 달려듭니다. 산 짐승에게 달려 들어 물어 뜯을 겁니다. 왜요? 사자는 풀도 먹을 수 있고 고기도 먹을 수 있지만 그 본성이 너무나 간절히 고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럴 경우 반드시 고기만 먹습니다. 이런 것을 ‘필연적’이라고 말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죄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죄라는 바이러스에 의해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간절히 악을 원합니다. 마치 사자가 고기를 선택하듯 백이면 백 다 악을 선택하고 죄를 행합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은총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악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선을 택하도록 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선을 택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죄를 범한다는 것은 누가 강제해서 억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절실한 욕구를 품고 죄를 향하고 죄를 택하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 때문에 뺐긴 것은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건전성이니까요. 그래서 베르나르두스(Bernard)라는 사람은 이런 옳은 말을 했습니다. ‘단순히 결심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악을 결심하는 것은 부패한 본성이 하는 일이며, 선을 결심하는 것은 은총이 하는 일이다.’ 이와 같은 원리로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십니다. 절대 죄를 짓지 못하십니다. 누가 억압해서 선을 행하시거나 누가 막아서 죄를 짓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무한히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 악을 멀리하고 선만을 행하시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마귀는 필연적으로 악합니다. 누가 강제로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한히 사악하기 때문에 도무지 선을 행할 마음도 여유도 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서 끓어 넘치는 악 때문에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해 악을 행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사람의 이성과 의지의 갱신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선을 행하게 될까요? 우선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을 행하기 위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2:10)“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그 시작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빌리보서1: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이 말씀에는 그 착한 일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선포가 동시에 담겨 있지요. 성도들 속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은 무엇이든 다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끝이 납니다. 그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려고 찾아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지요. (에스겔36:26-27)“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돌 같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살 같은)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라.” 돌이 살이 될 수 있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협력자가 될 수 있을 찌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새 의지를 만드십니다. 이렇게 개조되지 않은 의지에서는 선이 나올 수 없으며 개조된 후에도 선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말미암아 옵니다(렘32:39-44).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 항상 인간의 의지보다 앞서 작용하며 그 의지는 항상 하나님의 은총보다 뒤에 옵니다. 그래서 솔로몬도 우리 가운데 시작된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기를 기도했으며(왕상8:58), 다윗도 그렇게 기도합니다(시51:10). 예수님도 포도나무와 가지를 비유로 같은 말씀을 하셨지요(요15:5). 하나님의 은총 없이 선한 열매를 맺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무에서 잘린 가지가 제 주제도 모르고 햇빛과 비만 믿고서 자기도 열매 맺겠다고 큰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될 뿐 아니라 계속 그 뿌리에서 올라 오는 은총의 진액을 마시며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가 선행을 결심하는 것이나 그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나 다 하나님에게서 옵니다(고전12:6; 요6:44-45). 그래서 성도들은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 자기 속에서 머물도록 구하는 것이지요(시119:133). 성도들의 의지가 갱신되는 것도, 지속되는 것도, 그리고 끝까지 보존되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됩니다.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합니다. 타락한 본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이지만 은총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 역시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또한 처음엔 은총으로 시작해서 다음엔 협력하는 관계로 변하지도 않습니다. 또 우리의 노력이 은총을 상급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의 노력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계속 더 큰 은혜를 낳는 것이지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리라.”(마25:29)는 말씀의 뜻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모든 평생의 수고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고전15:10). 이렇듯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은총이 주는 기쁨으로 불굴의 힘을 얻어 끝까지 견디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쇠고랑’을 찬 인간의 오성과 자유의지는 악 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또 악을 행할 능력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자로 나올 수 없습니다.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하며 무덤 속에서 부활의 기적을 창조하셨던 예수님의 그 능력이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그 부활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의 여러분의 본성과 의지를 붙드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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