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과정

  • 홈 >
  • 배움터 >
  • 기독교강요 과정

이곳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메타포로 배우는 곳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셔서 네이버 카페 / 소풍교회 배움터 / 로 가시면 기독교강요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을 눌러 보세요.

소풍교회 배움터 바로가기

기독교강요 과정
기독교강요 2부 4장 : 삼겹 줄 임병욱 목사 2024-11-0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43

http://www.sopung.or.kr/bbs/bbsView/166/6459626

[성경본문] 에베소서2:1-10절 개역개정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12일

오늘은 24장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오성과 이성, 그리고 의지가 결박당해 열린 무덤처럼 필연적으로 악 밖에는 생산해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펼쳐가시면서 때론 은혜를 더하시고, 때론 은혜를 거두시면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고 했습니다. 곧 작정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섭리해 가시는 것이지요. 오늘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섭리해 가실 때 구체적으로 죄인들 속에 어떻게 역사해 가시는 지를 살펴 봅니다.

가끔 영화를 보면 악당들이 시한폭탄을 설치해 놓고 도망갑니다. 그러면 주인공이 나타나 땀을 흘리면서 그것을 제거해 내지요. 그럴 때마다 등장하는 뻔한 장면이긴 하지만 주인공은 폭탄에 연결되어 있는 전선들을 눈 앞에 놓고 고민합니다. 빨강, 파랑, 노랑의 삼겹 줄이 서로 꼬여 있는데 과연 어떤 선을 잘라야 되는가! 선을 잘 못 건드리면 폭탄이 터지고 맙니다. 왜 어렵지요? 그 삼겹 줄 선들이 다 제 각기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자를 수 있는 선은 딱 한 개만 있습니다. 그 선을 잘라야 전체 작동이 멈추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 속에도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 자신의 마음이 동시에 역사한다고 합니다. 마치 시한폭탄의 삼겹 줄이 작동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삼겹 줄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죄인 속에서 작용하는 그 신비한 관계를 살피려는 것이지요. 세상의 사건과 죄인의 행동 하나에 담긴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의 몫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부입니다.

이 사실을 배우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타락한 인간은 사탄.마귀의 세력 아래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의 종 노릇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와 하나님과 사탄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의지는 기수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과도 같다. 만약 하나님이 그 말의 기수로 타시면 그분은 선하시고 완전한 기수이시기 때문에 말을 올바르게 인도하신다. 느릴 때에는 박차를 가하시고, 너무 빠르면 고삐를 당기시고, 너무 거칠거나 너무 지나치면 억제하시며, 도중에서 안 가겠다고 앙탈을 부려도 잘 조정하셔서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에 올라 앉게 되면 그는 너무나 악하고 미련하고 난폭한 기수라서 말을 아무렇게나 몰아 바른 길에서 떠나게 하며, 도랑에 쳐 박으며, 벼랑에서 떨어지게 하며, 찌르고 괴롭혀 결국 고집쟁이 난폭한 말이 되게 만든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주 통쾌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죄에 붙들려 있기에 항상 필연적으로 사탄의 역사에만 복종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그리고 기꺼이 그렇게 합니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워낙 그것이 죄에 꽁꽁 묶여 있기 때문에 스스로 선을 사모하고 결심하거나 선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죄를 통해 역사하는 사탄은 그렇게 죄의 쇠고랑을 찬 인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흔들어서 또다시 필연적으로, 그리고 자진해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은 항상 사탄 마귀의 세력 아래 있습니다. 이럴 때 죄인의 마음 속에서는 마귀가 온갖 충동질과 유혹과 음모로 역사합니다. 흔히 죄 짓는 사람들을 보면서 사탄이 역사한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부패한 인간의 의지가 사탄이 활개치며 역사하는 마당이 되고 토대가 되어 죄악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도 여전히 욕망이 꿈틀거리며 죄를 사모하고 있기에 언제든지 사탄의 온갖 충동질과 유혹과 음모의 역사를 인해 흔들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같은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의 욕망은 동시에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 역사를 펼쳐가실 때 죄인 속에서도 역사하시며, 그들의 행동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두시어 그것을 통해 선한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사탄은 죄인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합니다. 이때 사탄의 활동 역시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때 죄인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부패하고 타락한 욕망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욕망은 사탄에 의해 강화되고, 죄인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타락하고 부패하여 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예를 한번 또 생각해봅니다. 욥이 그처럼 한 순간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을 잃는 과정을 보십시오. 어떻게 순식간에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나귀를 탈취해 갑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도 달려들어 종들을 죽이고 낙타를 빼앗아 갑니다. 그 때 큰 바람이 불어 욥의 집을 치매 무너져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음을 당합니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스바 사람들이나 갈대아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1:12). 그런데 욥을 보십시오. 욥은 순식간에 당한 그 모든 일을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로 보고 있습니다. (1:21)21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이 악을 만드시는 분일까요? 하나님이 사탄을 자기 동역자로 삼으신 것일까요? 사람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이 모든 위험한 의심들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만 알면 됩니다. 하나는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방법입니다. 한 가지 사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의 목적과 방법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살펴 보면 그런 의심들은 시원하게 해결됩니다.

다시 욥의 경우를 살펴 봅니다. 우선 목적입니다. 성경을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읽으면 마치 욥이 망한 것은 사탄이 하나님께 하도 졸라서 하나님이 할 수 없이 사탄과 내기 시합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지요. 욥이 망하는 그 한 사건 안에는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의 악한 욕심이 동시에 작용한 것입니다. 시한폭탄에 연결된 삼겹줄 같지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줄은 바로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기 때문에 사단도 갈대아인도 하늘의 불도 그렇게 미친듯이 역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난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욥을 연단시키려 하셨습니다.(욥기 42:5-6)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은 욥을 공정한 심판과 무한한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나 사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욥을 절망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멈추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은 법과 공의를 어기면서까지 자신들의 욕망과 사악한 이기심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그 목적들이 다릅니까?

다음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괴롭히도록 허락하시며 갈대아 사람들을 그 심부름꾼으로 택하여 사탄의 지배 아래로 넘기십니다. 그러자 사탄은 독 묻은 창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자극하여 악행에 몰두하게 하고 실행하게 합니다. 그리고 갈대아 사람들은 기꺼이 사탄의 충동에 순종하여 미친듯이 범죄로 돌진해서 자기들 몸과 주변 세상을 온통 죄로 물들이며 더럽힙니다. 이 때 하나님은 독자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을 시행하기 위해 사탄을 자신의 진노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사탄은 하나님이 명하시는대로 사방팔방 미친듯이 날 뛰며 돌아 다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적과 방법을 구별해서 살피면 같은 사건 같은 행동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탄과 사람의 추악함이 서로 혼동됨이 없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고난이 모두 하나님의 징계는 아닙니다. 예컨대 순교자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이 징계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순교자는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스테반이 사람들에게 돌 맞아 죽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떡 일어 서시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순교하고 세상에서 핍박 받고 가족들에게 미움받고, 고난의 삶을 사는 것은 죄 때문에 징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재앙을 당할 때 무조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저런 고난을 당하는 성도 자신은 그 때마다 자기 마음을 낮추고 회개할 것을 찾아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쉽게 당신은 지금 징계 받고 있소.’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혹시 그것이 징계이더라도,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그를 징계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린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다 모릅니다.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면 안 됩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악들도 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그렇게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 모든 악과 재앙을 통해서 죄를 징벌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룩하게 하고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죄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감사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전에는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탄의 충동질을 피할 재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사탄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권능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탄의 충동질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의 말씀입니다. 10절을 다시 읽어 봅니다. (엡2:10)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끓어 오르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엎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은총을 거두시거나 저주를 더하심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 역사를 펼쳐가실 때 죄인들에게서 은총을 거두시거나 저주를 더하심으로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종종 사람의 마음이 강퍅해지고 굳어지고 허탄한 것에로 돌아 간다.’는 등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 속에 어떻게 역사를 하신 것일까요? 보통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지(豫知)’허용이란 말로 그 어려운 질문에서 도망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미리 알았다는 말이지요. 또 그렇게 되도록 허용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답으로는 너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그렇게 강퍅하게 만들기도 하고 또는 굳은 마음이 되게 하기도 하십니다. 첫째는 은총을 거두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도로 거두워 가실 때 사람들은 강퍅케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강퍅케 하고 마음을 굳게 만드셨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둘째는 저주를 더하심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악한 성품을 더 악하게 하시고 강퍅한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처음 경우보다는 나중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시행하시기 위해 심판의 도구인 사탄을 시켜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시는 것이지요. 이것도 그들이 자기 죄에 대한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시려는 ​일종의 공정하신 심판입니다. 죄인에 대한 벌로 저주를 더하시는 것이지요

그런 예는 성경에 참 많습니다. 첫째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을 오직 부패한 본성 가운데만 내 버려 두시는 것이지요. 은총으로 주셨던 지식과 총명과 양심 등을 도로 빼앗아 가버리시는 것입니다(12:20,24; 7:26; 107:40). 둘째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더욱 악하게 하시고 굳게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은 그 좋은 예지요(7:3-4; 10:1,20,27). 모세도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합니다. (2:30)30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은혜를 뺏어 가심으로 사람을 완강하게만드시기도 하시지만, 또 저주를 더 하심으로 그렇게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벌 하실 때에는 항상 버림 받은 자들을 도구로 부르셔서 시행하셨습니다(5:26; 7:18; 12:13; 17:20; 50:23; 10:15).

그러므로 사탄도 하나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사무엘서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만 자기의 악을 마음대로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삼상16:14; 18:10; 19:9; 살후2:10-11). 이처럼 사람은 타락한 자기 본성이 생긴대로 악을 행하고 사탄도 생긴대로 미친 짓을 행하지만 그 모든 작정과 권능은 오직 공정한 심판과 무한한 사랑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넷째,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자유를 지배하십니다. 부패한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를 행할 능력이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통해 사회 생활에서 수도 없이 부딪치게 되는 일반적인 의들을 행할 능력들을 부어 주십니다. 왜요? 그래야 세상 역사가 펼쳐지고 유지되어,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골라 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부패한 본성 속에서도 서로 돕고 불쌍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며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하는 등의 일반적인 선행이나 어떤 재능과 기술 등 그 자체로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많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자유를 행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루터파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의지에 자유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말할 때 이미 설명한 것처럼 그 모든 선한 행위와 재능과 기술 등이 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의 은총 안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어 애굽 백성들은 출애굽하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 금 등의 패물을 줍니다(11:2-3). 누가 그들의 마음을 그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뜻대로 사람의 마음을 선으로 혹은 악으로 기울어지게 만드십니다(106:46; 삼상11:6; 삼하17:14; 왕상12:10,14).

그러므로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상생활의 가장 작은 일부터 아주 큰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도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인도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일을 잘 이해 못하거나 용기를 잃고 헤매는 반면, 아주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놀라운 지혜가 생기고 용기가 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지요. 솔로몬은 그와 같은 뜻에서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21:1)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했지요. ‘사람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안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곳으로 기울어지게 하십니다. 혹은 은혜를, 혹은 벌을 주시려고, 그리고 가장 비밀한 그러나 가장 공정한 판단에 의해서 그렇게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9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삼겹 줄의 역사를 기억하십시오. 한 사건과 행동 안에는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이 동시에 역사합니다. 물론 서로 전혀 다른 목적과 방법으로 역사하지요. 하나님은 은총을 거두시거나 혹은 저주를 더 하심으로 죄인들의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사탄을 명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시행하게도 하시지요. 그 속에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몸부림 치면서 쓰임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을 작정하시고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문 방송을 보면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너무 흥분하거나 너무 좌절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죄인과 죄를 징벌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해 가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며, 또 그 뜻대로 쓰임 받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끓어오르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사탄의 충동질에 쓰임 받으면 안 됩니다. 무슨 일에든지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에게서 어떤 악을 발견한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근심하고 회개하는 것 외에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선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떡합니까? 무조건 그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무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에게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소서!’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머물러,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복된 인생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기독교강요 2부 5장 : 바벨 탑 무너뜨리기 임병욱 목사 2024.11.07 0 45
다음글 기독교강요 2부 3장 : 열린 무덤 임병욱 목사 2024.11.07 0 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