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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5장 : 바벨 탑 무너뜨리기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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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10-12절 개역개정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오늘은 2부 5장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오해들을 반박하는 내용이지요. 인간의 자유의지가 뭐라고 그랬지요? 오감을 통해 정보를 습득하는 오성과 그것을 판별하는 이성, 이성이 판별한 것을 선택하는 의지를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그랬지요? 칼빈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타락 이후로는 오성과 이성, 그리고 의지가 결박당한 채로 있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는 열린 무덤처럼 필연적으로 악 밖에는 생산해 내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오성과 이성, 그리고 의지는 죄의 노예가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죽어 무덤에 누워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펼쳐가시면서 때론 은혜를 더하시고, 때론 은혜를 거두시면서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고 했습니다. 칼빈이 이렇게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죽었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얼마나 큰 지를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터무니 없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칼빈은 2부 5장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향해 또 다시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일침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칼빈의 이야기를 ‘바벨탑 무너 뜨리기’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그 옛날 시날 평지에 쌓았던 바벨탑은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들이 쌓은 탑이지요. 하나님은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들이 쌓는 바벨탑을 무너뜨리심으로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죄의 쇠고랑을 찼다는 데 대해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쇠고랑을 찬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연적으로 자원해서 죄밖에 지을 것이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차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또 다시 바벨탑을 쌓기로 했나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쌓아 올린 바벨탑은 ‘교만의 탑’이요, ‘혼잡한 말 장난’에 불과합니다. 오늘 공부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혼잡한 말 장난’을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교만한 인간들이 쌓고 있는 첫번째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자유의지가 다만 죄의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죄가 필연적이라면 그것은 죄라 할 수 없고, 또 만일 죄가 자원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옛날 펠라기우스도 이런 말로 어거스틴을 공격했었지요. 그러나 사람이 반드시 죄를 지으며 악한 일 밖에 결심할 수 없다는 것은 창조에서 온 것이 아니고 타락과 부패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필연성이야 말로 인간이 정죄를 받아야 할 가장 명백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은 사탄처럼 넘치는 악으로 말미암아 자원해서 죄만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피할 수 없고 선은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필연적으로 죄만 짓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처럼 ‘만일 죄가 필연적이라면 상벌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이 말도 그저 트집 중 하나이지요. 선행이든 죄악이든 사람이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에게 상이나 벌을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자원해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모든 죄책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타락과 부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은 다릅니다. 상은 우리의 공로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의 타락 때문이지만 상은 상은 우리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공로를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4:7; 롬8:30). 곧 공로에서 은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서 공로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을 세우는 은총을 주시고 또 그 세운 공로에 상을 주십니다. 또 그들은 만일 인간의 의지가 선을 선택하는 능력을 못 가졌다면 어차피 같은 본성을 가진 인간들은 모두 악하기만 할 것이니까 선악의 구별이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곧 죄가 필연적이라면 선악의 구별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악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다 악하지만 하나님은 또 어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 악에서 돌이키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하시는 사람들만 그 행복을 누립니다. 그래서 선과 악은 낮과 밤처럼 분명히 구별됩니다. 또 그들은 ‘만일 죄가 필연적이라면 모든 충고가 다 쓸데 없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럴 듯한 말이지요? 옛날에 어거스틴이 그 비슷한 반대를 받았을 때 그는 ‘책망과 은총에 대하여’(On Rebuke and Grace)라는 글을 써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사람아 교훈을 듣고 그대가 해야 할 일을 깨달으라. 책망을 받고 그대에게 그것이 없는 것이 곧 허물임을 깨달으라. 그리고 기도를 해서 그대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를 깨달으라.’ 또, ‘영과 문자에 대하여’(On the Spirit and the Letter)라는 글에서는 ‘하나님은 사람의 힘을 기준으로 해서 율법의 교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명령을 주신 하나님은 또한 모든 선택하신 자들에게는 그것을 지켜 행할 수 있는 힘도 풍성히 주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랑을 행하라고 얼마나 엄중히 명령합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분명히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6)고 말합니다(참조, 요15:5; 고전3:7; 사5:24; 단9:11; 신10:6; 렘31:33; 겔36:26).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충고는 풍성하십니다. 듣고 깨달을 것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 교훈을 깨닫고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충고를 듣고 양심이 찔리고 압박을 받으면서도 충고들을 거절하지요. 그래서 충고는 곧 그들에게 징계가 되고 심판이 되고,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또한 그들을 고소하고 정죄할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자들에게는 말씀의 충고가 성령의 손에 들린 칼이 됩니다. 성령께서 신자들 속에서 은총으로 역사하시는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안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내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외면적으로는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렇게 성령은 말씀의 충고를 사용해서 택하신 자들 속에 선한 소원을 일으키며 게으름을 떨쳐버리며 죄악의 달콤한 욕망을 제거하는 동시에 죄를 미워하는 힘을 분발 시키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충고와 교훈은 버림받은 자에게나 선택받은 자에게나 모두 유용하게 쓰입니다(고후2:15-16). 교만한 인간들이 쌓고 있는 두번째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책망을 보아도 자유의지가 죄의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교훈을 주신 것은 당연히 인간이 그것들을 선택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지킬 수도 없는 교훈을 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릴 희롱하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지킬 수 있다는 것 아니냐는 주장인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무능함과 죄를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갈3:19,22; 롬3:20;5:20;7:7-8).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명령하셔서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곧 율법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율법의 교훈은 다음 세 종류로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명령입니다(욜2:12; 호14:2-3). 하지만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거 아닙니까?(렘31:18-19; 신30:6; 겔11:19; 36:26).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이 협력하는 것이 아닙니다(행11:18;슥12:10). 둘째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갈5:22-26; 요15:5). 그리고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거하라는 것입니다(행13:43).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힘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엡6:10; 4:30; 살후1:11; 고후8:1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것과 책망하신 것을 보면 우리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다는 증거이다.’라는 주장은 오해에 또 오해를 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수많은 약속들이 꼭 우리가 마음대로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암5:14; 사1:19-20). 그러나 이미 충분히 증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그것이 정죄와 심판의 근거가 되며 신자들에게는 회개와 격려와 분발하게 하는 성령의 유용한 도구가 됩니다. 교만한 인간들이 쌓고 있는 세번째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성경의 특별한 몇 구절을 보더라도 자유의지가 다만 죄의 노예 상태에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지요. 한 예로 신30:11-14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사랑의 언약을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곧 ‘너희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명령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겠다’는 것이지요. 바로 앞의 6절에서 하나님은 명령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할례를 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신명기 30:6)“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또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은 만약 죄악이 ‘우리 것’이라면 선행도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말을 서슴없이 내 뱉는 것을 보니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죄 밖에 지을 수 없다는 말이 못내 기분 나쁜가 봅니다. 하지만 선행은 우리 것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주기도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용할 양식은 누구의 것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주신 것이니까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의미에서라면 선행들도 다 ‘우리 것’입니다. ‘결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고 바르게 결심하는 것은 은총에 속한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은 정말 바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합니다.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은 다 우리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요. 둘째 하나님이 선을 행하도록 지도하시는 그 마음도 우리 것이요, 의지도 우리 것이요, 노력도 우리 것입니다.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은 계속해서 롬9:16, 고전3:9, 눅10:30 등을 들어 우리 자유의지가 ‘어느 정도는 활동을 한다’느니 ‘절반은 살아 있다’느니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롬9:16이 가르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도 노력도 아닌 하나님의 자비 뿐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9: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고 눅10:30에 대한 저들의 주장은 풍유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한것을 교리의 완전한 토대로 삼으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하시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언제든 ‘절반 살은 자’ 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셨다’(엡2:5)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에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철저히 부패해 있고 우리의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입니다. 간혹 선한 모습들이 언뜻 언뜻 비치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적 패악성으로 꽁꽁 묶여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정도면 이제 여러분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총과 성경 말씀과의 관계를 충분히 알았을 겁니다. 정리하면, 우리의 부패한 자유의지는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별할 줄도 모르고, 혹시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별해 놓아도 똥 대신 된장을 선택할 능력도 없습니다. 분별은 오성이 하고 선택은 의지가 합니다만 둘 모두 쇠고랑을 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자에게는 성령께서 말씀의 풍성한 계명과 약속과 충고들을 이용하셔서 기도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십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회개하게 하십니다. 둘째 순종하게 하십니다. 셋째는 항상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십니다. 그리고 넷째, 무엇을 기도할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죄만 짓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런 은혜가 항상 임하여 역사하시고, 평생 이 은혜 가운데 머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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